[ESC]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
전남편이 시신 발견
악취로 아연실색
온 집안엔 가루 천지 새벽 2시 비명 들은 이웃
혈흔 족적 발견
20대 청년 용의자
김미윤(가명)씨 사건은 일명 ‘부침가루 사건’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전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김범수 미제팀장은 0.5초 만에 “부침가루 사건이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약간 머쓱해서 왜냐고 묻자 ‘너무 선정적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있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하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미제팀에선 ‘갈마동 빌라 사건’이라 부른다고 했다.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다. 미제살인사건을 취재하면서 기분 좋은 순간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때만은 예외였다.
2005년 11월2일 오후 1시30분, 스물여섯살 미윤씨는 자신이 살던 대전시 서구 갈마동 빌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미윤씨를 발견한 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 있던 전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석달 전 다시 만나 재결합에 합의한 상태였다. 남편은 10월28일 저녁 8시30분쯤 통화한 뒤 연락이 두절된 아내가 걱정됐다. 하루 정도는 무슨 일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틀째가 되자 걱정이 커졌다. 고민 끝에 대전에 사는 지인에게 집으로 찾아가 보게 했다. 부탁을 받은 지인은 10월30일 저녁 7시와 다음날인 31일 오전 10시30분에 두 차례나 찾아갔지만 미윤씨를 만날 수 없었다. 문 앞에 전단지가 수북하게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을 비운 지 오래된 것 같다는 말만 전해왔다. 남편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급히 일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돌아온 전남편은 열쇠 기술자를 불러 잠긴 문을 여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악취 때문이었다. 불과 엿새 전 통화했던 아내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패한 시신이 되어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초겨울 추위에 보일러를 가동했기 때문인 걸로 보였다.
미윤씨는 외투를 입은 상태였지만, 상의는 가슴팍까지 올라가 있고 하의는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양쪽 발목은 노란 박스테이프로 결박돼 있었다. 황급히 신고 전화를 거는 전남편의 눈에 엉망이 된 방 안이 들어왔다. 집안 곳곳엔 살림살이가 흩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부엌칼과 지갑, 신용카드, 미윤씨의 휴대전화 등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침대를 비롯한 집안 곳곳에 하얀 가루가 뿌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출동한 경찰은 하얀 가루의 정체가 부침가루라고 했다. 주방 쪽에서 거의 빈 부침가루 봉지가 발견됐는데 침대에 뿌려진 가루와 일치한다는 것. 가루는 범인이 현장을 오염시키려는 의도로 뿌린 것으로 경찰은 봤다.
그런데 이상한 흔적들이 더 발견됐다. 방 안에는 티브이가 켜져 있었고 세탁기 안에선 침대에 있던 이불이 세탁된 채 발견된 것. 경찰은 범인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추기 위해 티브이를 켠 것으로 보았다. 세탁기 속의 이불 또한 범인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범행 직후 세탁한 것으로 봤다. 그러면 범인은 어떻게 집 안으로 침입했을까. 창문이 모두 잠겨 있었으니 외부에서 침입한 걸로 보긴 힘들었다. 범인의 침입 경로는 이웃집 주부의 진술로 짐작할 수 있었다. 10월29일 새벽 2시쯤 미윤씨 집 쪽에서 “아저씨 왜 이래요!”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고, 곧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옆집에서 다시 비명이 들리자 겁이 난 이웃집 주부는 아직 귀가 전이던 자신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 그 시각은 새벽 2시9분 무렵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 결과 미윤씨가 발견되기 사나흘 전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11월이라 쌀쌀한 날씨였지만, 밀폐된 방 안에 보일러가 가동되고 있었기에 시신이 빠르게 부패한 걸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미윤씨의 사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발견 당시의 모습으로 보아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런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간을 비롯한 장기가 파열돼 있어 심한 폭행이 선행됐을 거라는 소견도 밝혔다. 누가, 왜, 미윤씨를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걸까.
우선 숨지기 전 미윤씨의 행적부터 확인해봤다. 미윤씨는 당시 대전의 한 유흥주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혼 뒤 생계가 막막해서였다. 전남편과 재결합에는 합의했지만 여섯살 난 아들을 시댁에서 데려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돈을 더 벌어야 했다. 그래서 미윤씨는 일하던 중 자주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10월28일 저녁 남편과 마지막 통화를 마친 뒤 주점에 출근한 미윤씨는 10월29일 새벽 1시40분쯤 퇴근했다. 당시 퇴근 시간은 한참 멀었지만, 취해서 자꾸 울음을 터뜨리는 미윤씨를 보다 못한 사장이 집으로 돌려보냈던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온 미윤씨는 새벽 1시48분 무렵 집 앞에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이때 미윤씨가 타고 온 택시의 기사도 찾아내 그 시각쯤 미윤씨를 갈마동 빌라촌에 내려줬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웃집 주부가 두번째 비명을 듣고 남편에게 전화를 건 때가 새벽 2시9분이었으니, 경찰은 이때 범인이 전화를 끊고 집으로 들어가는 미윤씨를 뒤쫓았던 것으로 봤다.
미윤씨가 살던 갈마동은 빌라나 원룸,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지역으로 당시만 해도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린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물론 미윤씨의 직업으로 미루어 주점에서 알게 된 면식범의 범행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웃집 주부가 “아저씨 왜 이래요!”라는 비명을 들었다고 했지만, ‘아저씨’라는 호칭은 초면인 사이에도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에도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 결과 미윤씨가 특별히 친하게 지냈거나 곁을 내준 손님은 없었고,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된 손님 또한 없었다.
경찰은 원한 관계, 치정 관계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했다. 최초 발견자이자 가장 가까운 사이인 남편도 조사했다. 그러나 남편의 행적은 명확했고, 원한이나 치정 관계도 확인되지 않았다. 심지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슷한 수법의 범죄가 등장하는 영화를 빌려본 사람들도 모두 조사했지만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은 10월29일 새벽 2시부터 3시까지를 범행 시각으로 봤다. 미윤씨의 친구가 새벽 2시59분쯤 전화를 걸었는데 누군가 받아서는 아무 말 없이 끊더라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미윤씨의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분리된 채 침대 위에서 발견됐다. 미윤씨가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배터리를 분리하는 방식으로 끊을 이유는 없었다. 휴대전화와 배터리에도 부침가루가 묻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범인은 전화를 끊은 뒤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휴대전화에선 범인의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증거가 모두 인멸된 건 아니었다. 경찰은 정밀 감식 결과 부침가루 봉지에서 ‘쪽 지문’을 하나 발견했다. 미윤씨의 지문은 아니었으니 범인의 지문이 거의 확실했다.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남성의 신발 바닥 무늬, 즉 족적도 나왔다. 분석 결과 신발은 공장이나 공사 현장 등에서 흔하게 신는 작업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부침가루로 뒤덮인 침대 매트리스에서 범인의 혈흔도 발견됐다. 미윤씨의 발등에서도 혈흔이 발견됐다. 경찰은 이 2점의 혈흔을 분석해 범인의 유전자(DNA)를 확보했다. 경찰은 쪽 지문에 족적에 유전자까지 확보했으니 사건은 곧 일사천리로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조군에서는 일치하는 유전자를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이 이전에는 같은 범죄로 검거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유력한 목격자가 나타났다. 10월29일 새벽 갈마동 인근에서 수상한 남성을 태웠다는 택시 기사였다. 그는 새벽 2~3시 무렵 갈마동 인근에서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을 태웠다고 했다. 그런데 달리던 중 뒷좌석의 기색이 이상해 살펴보니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는 것. 계속해서 한숨과 거친 숨을 번갈아 토해내는 청년이 이상해 계속 관찰하던 중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청년은 운전석 팔걸이 박스 쪽에 구겨진 지폐를 던지고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년이 낸 천원짜리 지폐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날이 밝은 뒤 확인하니 청년이 앉았던 자리에 흰 가루가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택시 기사는 청년의 외모가 살찐 건 아니었지만 운동을 많이 한 듯 근육질이었고, 키는 175~180㎝ 정도로 보였다고 했다. 정황상 무척 신빙성 있는 진술이었다. 하지만 새벽 시간이라 얼굴 식별이 힘들었기에 몽타주는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진술만으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청년의 하차 지점을 중심으로 집중 탐문 수사를 벌였지만 그 역시 소득은 없었다.
미윤씨가 세상을 떠나던 2005년에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은 여섯살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으니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대전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에선 이 사건이 언급될 때마다 어김없이 고인의 아들을 얘기했다. 방송이 나가거나 기사가 나갔을 때 사춘기를 맞았을 고인의 아들이 받을 충격을 항상 우려했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곤 했다. ‘미제사건은 못 잡은 사건이 아니라, 잡게 될 사건’이라고.
※ 대전 갈마동 빌라 사건에 관한 정보가 있는 분은 대전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042-609-2872)으로 제보해주세요.
조수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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