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커버스토리
취미로 희귀언어 배우는 이들
개설된 포털사이트 회원수만 3만여명
평등의 철학 깔린 에스페란토 등
"학습이라기보단 놀이···힐링돼 좋아"
취미로 희귀언어 배우는 이들
개설된 포털사이트 회원수만 3만여명
평등의 철학 깔린 에스페란토 등
"학습이라기보단 놀이···힐링돼 좋아"
* 호모로퀜스 : 언어적 인간
백인선(31·미술교사)씨는 타이(태국)어를 배운 지 9개월째다. 동그라미와 곡선이 많아 ‘그림 같고 아기자기한’ 타이 글자를 보는 순간 불현듯 타이어가 배우고 싶어졌다. 이제는 타이어로 된 문구라면 뭐든 캘리그래피(붓이나 펜으로 쓰는 글씨)로도 쓸 수 있을 정도지만, 타이 글자에 매력을 느끼기 전까지만 해도 타이는 ‘별 감흥 없는’ 나라였다. “타이, 올 7월에 처음 가보는 거예요. 발목에 타투를 할 생각인데, 도안은 타이 글자와 동물 그림을 조합해 직접 만들고 싶어요.”
지난해 의대 교수로 정년퇴임한 김광택(67)씨는 1년2개월 전 라틴어를 처음 배웠다. 은퇴를 앞두고 “취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라티우스(로마 시대 시인)의 시를 원전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정암학당’에서 열리는 키케로(로마 시대 철학자) 강독에도 참여한다. “다양한 분들과 라틴어 원전을 읽으면서 그리스·로마문명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공부하는 태도도 배우고 있어요. 배움과 삶에 대한 열정을 지속하는 동력이 됩니다.”
‘호모로퀜스’, 언어적 인간. 언어를 배우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토플 점수를 높이겠다거나 테솔(영어 교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차원의 배움이 아니다. 언어는 이들에게 스펙이나 생계와는 무관하며, 때로는 학습이라기보다 놀이에 더 가깝다. 고유의 운율 때문에 이탈리아어에 ‘꽂힌’ 정해나(27·회사원)씨는 말했다. “스트레스요? 전혀요.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쉬엄쉬엄하는데다, 잡념이 사라지니 오히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죠.” 자발적인 배움으로 얻는 정신적인 위로다.
비단 이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포털에 개설된 ‘태국어 뽀개기’의 회원수는 3만명에 이르고, 희랍어와 라틴어, 산스크리트 카페 ‘바벨의 도서관’은 3만3천명이 넘는다. 언어 습득을 ‘순수한 취미’로 삼는 이들이 함께할 동료를 찾는 게시물이 하루에도 수십건씩 올라온다.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처럼 좀더 대중적인 언어라면 관련 카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손경여(48·출판인)씨는 10여년 전 남편의 권유로 접한 에스페란토에 매료된 경우다. 에스페란토는 세계 200만명 정도가 쓰는 언어로, 특정 국가나 민족의 언어가 아니다. 1887년 ‘누구나 평등하게 소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인공어(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민족어와 달리 인간이 의도와 목적에 따라 만든 언어)이자 국제어다. 역사를 거듭하며 불규칙과 예외가 많아지는 민족어와는 달리, 문법이 매우 단순하며 예외가 없다. “한달에서 석달이면 웬만한 말은 다 할 수 있어요. 그만큼 배우기가 쉬워요.”
손씨가 생각하는 에스페란토의 매력은 그 안에 깃든 ‘평등의 철학’이다. 지난달 30일, 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그는 ‘2007 요코하마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참가담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양털 깎는 사람이건 꿀벌 키우는 사람이건 생각은 하나였어요. 패권이 없는 제3의 언어, 평등의 언어를 쓰자는 거였죠.” 세계에스페란토대회는 각국의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 쓰는 사람)가 모이는 세계적인 축제로, 강좌, 회화교실, 파티, 꽃꽂이반과 바둑반 같은 다양한 행사로 구성되는데, 모두 에스페란토로만 진행된다.
손씨 부부가 에스페란토를 좀더 체득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건 세계대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챙겨 떠났어요.” 그들은 독일 헤르츠베르크에 있는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본거지 삼아 4개월 동안 독일, 폴란드,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등을 다녔다. 그때도 소통은 에스페란토로만 했다. 에스페란토는 영어가 아니건만, 그게 말이 되냐고? 연대의식이 끈끈한 에스페란티스토끼리는 가능한 일이다. 요즘의 ‘카우치서핑’(무료 숙박, 문화 교류)과 비슷한 문화지만, 역사는 더 유구하다.
“인명부에서 해당 지역 에스페란티스토를 찾아 문의하면 기꺼이 빈방을 내줘요. 우리도 일본인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신 적이 있고요. 생각보다 에스페란토 쓰는 사람이 많아요. 세계 어느 지역을 가도 1~2명은 있어요.” 부부는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모요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차렸다. 손씨가 밝힌 ‘모요사’의 의미는 이렇다. “영어로 ‘쿨’(멋지다!)에 해당하는 에스페란토 신조어예요.”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만난 안미리(31·회사원)씨는 엽서 한 장을 내밀었다. 2012년 프랑스 몽모랑시에서 만난 70대 할머니가 보내온 엽서였다. “힘든 시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게 된 곳이었어요. 대학 졸업 후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어 정말이지 ‘한 뼘도 있을 자리가 없구나’ 싶던 때였어요.”
안씨는 몽모랑시 한 가정집에서 세 자녀 통학, 빨래, 다림질, 청소 등을 하며 5개월을 지냈지만, 그 집 식구들과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쩔 땐 그 집에서 저를 의자로 대한다고 느꼈어요. 의자한테 인사할 필요는 없잖아요. 의자는 필요할 때 당겨서 앉으면 되는 거니까요. 혼자 오솔길이나 골목에서 울기도 했죠.”
그가 버틸 힘을 얻은 곳은 주민 센터에서 하는 동네 모임이었다. 산 중턱에 있는 시골 마을이어선지 안씨는 주민들에게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말도 못 하면서 자꾸 모임에 끼는” 안씨에게 호기심을 표하며 말을 걸어왔다. 티타임과 가족 모임 초대도 크나큰 위로였다. 그들이 뜯어준 빵을 먹고, 갓 우려낸 차를 마시면서 하나씩 표현을 늘려갔다. 그중에서도 엽서를 보내온 할머니가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다.
“관계가 생기니까 소통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그들을 알고 싶고, 제 얘기도 해주고 싶고. 개인적인 얘기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나 역사적인 이야기들, 이를테면 아시아인이 면을 먹는 방식이라거나 박정희 시대 얘기라거나 한국전쟁 얘기 같은 것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 뒤로 그의 프랑스어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어요.”
안씨는 요즘 일주일에 한번 스페인어도 배운다. 옷이나 화장품에 돈을 거의 쓰지 않는 그에게 언어 공부는 ‘가성비’가 뛰어난 취미다. 그는 언어 공부를 즐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어쩌면 하루 보고 못 보게 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요. 헬로, 생큐 하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헬로, 생큐보다 더 큰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을 때 많았어요.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목소리나 표정이 달라지다 보니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는 기분도 재미있죠.”
언어를 알면 그 문화에도 관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내가 가진 좁다란 세상이 더 넓어지는 신기한 체험을 희귀한 언어들은 선사한다. 덤으로 마음의 근육까지 커져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보다 지적인 힐링법이 있을까!
글·사진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안미리씨가 스페인어 공부에 쓰는 교재들. 강나연 객원기자
에스페란토 사전과 각종 정기간행물, 교재. 주황색 책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반지의 제왕>. 강나연 객원기자
자택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다 활짝 웃는 안미리씨. 강나연 객원기자
안미리씨가 프랑스에서 만난 할머니가 보내온 엽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 강나연 기자
외국어 다른 나라의 말. 국적이나 민족이 다른 사람끼리 소통할 때 필요한 수단. 한국에서는 입시나 스펙을 위한 도구로 변질돼 여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영어는 한국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입지가 공고해 영어 제국주의로 인한 모국어 오염, 희소언어의 소멸 가능성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최근에는 언어의 본래 목적인 의사소통 기능을 회복한 외국어 배우기, 고전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한 외국어 배우기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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