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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오빠가 도와줄게”…오빠 드립은 이제 그만!

등록 2018-03-01 09:59수정 2018-03-01 16:49

[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

손위 남자 형제 부르는 친족어, 오빠
‘미투 운동’ 가해자들 오빠 호칭 강요
여러 해 전부터 성적 뉘앙스 담긴 호칭으로
젠더 위계에서 호칭 쏠림 현상 두드러져
평창겨울올림픽 '마늘소녀'가 대표적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맹활약한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에 ‘의성 마늘소녀’라는 뜬금없는 별칭이 붙었다.            김성광 기자
평창겨울올림픽에서 맹활약한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에 ‘의성 마늘소녀’라는 뜬금없는 별칭이 붙었다. 김성광 기자
‘오빠’는 참으로 오묘한 말이다. 현대국어에서 오빠는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친족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전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친족뿐 아니라 연인 간에도 으레 쓰는 호칭이 ‘오빠’이며, 결혼했다 해도 어색한 말로 바꿔 부르기보다 연애 시절부터 굳어진 ‘오빠’를 계속 쓰는 부부도 흔하다. “시부모 앞에서는 ‘여보’니 ‘○○ 아빠’니 해도, 집에서는 편하게 ‘오빠’라고 해요. 한번은 친정에서 ‘오빠!’를 외쳤다가 친오빠랑 남편이 동시에 움찔한 적도 있었네요.(웃음)” 4살 많은 남편을 둔 박윤영(39)씨의 말이다.

‘오빠’가 ‘애인’을 대체하는 말이 된 것은 20세기부터다. 18세기 문헌 <화음방언자의해>에 ‘올아바’(오라바)라는 표기로 처음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오빠’는 남동생을 포함한 모든 남자 형제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여성이 ‘친오빠의 친구’와 의남매, 또는 동지적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성적 호감을 가진 남성’을 암시하는 말로 그 의미가 넓어졌는데, 이광수의 <무정>이나 <재생>, 현진건의 <적도>, 이기영의 <옵바의 비밀편지> 같은 근대소설을 보면 ‘오빠’에 담긴 뉘앙스가 시대흐름을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배우 조민기씨의 발언은 ‘오빠’라는 말에 담긴 성적인 함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추행과 강간미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조씨는 자신의 제자에게 “내 오피스텔에 살면서 샤워할 때 내 등도 밀어주고 밥도 좀 차려 달라”며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 교수님이 뭐냐? 그냥 다정하게 ‘오빠’라고 불러. 아니면 뭐… ‘자기야'라든지.” 이때 ‘오빠’라는 말은 ‘격의 없는 호칭’을 가장했으나, 결국 ‘지극히 사적인 행위’를 공유할 정도로 친밀해질 것을 요구하는 성희롱일 뿐이었다.

당혹스러운 ‘오빠 요구’에 시달리는 것은 비단 조씨의 피해자만이 아니다. 경험담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22살 대학생 고혜진씨는 말했다. “수능 끝나고 분식집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어요. 저는 ‘점장님’처럼 직책으로 부르는 게 편한데, 8살 많은 직원과 40대 후반 점장님이 자꾸 ‘편하게 오빠로 부르라’고 하더라고요. 억지로 웃으며 얼버무리긴 했지만, 솔직히 그분들이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하는 것만 들어도 불쾌했어요. 굳이 왜 ‘오빠가 도와줄게’, ‘오빠가 알려줄게’ 식으로 ‘오빠 드립’을 칠까요? 왜들 그렇게 ‘오빠’에 집착하는 걸까요?”

고씨의 ‘오빠 수난기’를 듣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록밴드 장미여관과 방송인 노홍철이 부른 노래 ‘오빠라고 불러다오’가 떠올랐다. “제발 아저씨라 부르지 마,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오빠! 오빠! 오빠라고 불러다오.” 아니, 어쩌면 이 노래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저 같은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보면 볼수록 나쁘진 않죠, 이제부터 오빠 말 놓을게, 이름이 뭐랬더라. 오빠라고 불러봐, 오빠, 오빠, 정말 오빨 못 믿니!”(노라조의 ‘오빠 잘할 수 있어’ 중)

혹자는 ‘누나’라고 해서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나를 오빠와 비슷한 호칭으로 생각하신다면 천만의 말씀. 누나는 ‘손위 여자 형제를 부르는 친족어’임에도 오빠와는 그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20대 초중반 이후로 줄곧 ‘연하남’만 만나온 채지안(36·의사)씨는 말했다. “생각해보니 항상 제 나이가 더 많았는데도 ‘누나’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더라고요. 저보다 어린 남자들은 사귀기로 한 첫날에는 무조건 호칭부터 정하자고 했어요. 지금 만나는 5살 어린 ‘남친’도 그랬고요.”

채씨가 ‘연하남’들과 주고받은 호칭은 대체로 쌍방 간에는 ‘자기’였고, 제삼자 앞에서는 ‘○○씨’였다. ‘자기’건 ‘○○씨’건 그들이 수평관계임을 드러내는 호칭으로, 한국 사회의 엄격한 연령주의·서열주의가 유독 ‘연상연하커플’에는 적용되지 않는 셈이다. 남성의 나이가 더 많을 경우 ‘오빠’가 연령 위계를 강화하는 호칭으로서 연인 사이에도 빈번히 쓰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이유로 윤수빈(30·회사원)씨는 오히려 ‘연하남’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순간, 상대방이 ‘철벽’을 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저한테 호감이 있으면서 저보다 어린 남자는 저를 절대로 ‘누나’라고 부르지 않아요. 사적인 경로로 만났더라도 말이죠. 반대로 ‘누나, 누나’ 하는 친구들은 저와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좀처럼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느껴져요.” 대학원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저보다 어린데 학번은 같은 친구였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학번이 같으니까 서로 ‘야자’ 하면서 지냈는데, 어느 날 저를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더니 그 친구가 그랬어요. ‘앞으로는 누나라고 부르겠다’고.”

듣고 보니 그랬다. ‘누나’는 ‘애인’을 대체할 수 없는 말이다. ‘누나’에게는 온전한 성적 주체로서의 지위가 부여된 적이 없었다. 일찍이 가수 이승기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너라고 부를게,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 놀라지 말아요, 알고 보면 여린 여자라니까”(이승기, ‘내 여자라니까’ 중) ‘누나’는 호감을 느끼거나 연애 대상이 되는 순간 더는 ‘누나’가 아니며, 그 즉시 ‘너’로 불리는 수평적 대상이자 보호해줘야 할 ‘여린 여성’으로 인식된다.

젠더 위계에서 비롯된 호칭의 쏠림 현상은 스포츠계에서도 두드러진다. 얼마 전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활약한 ‘컬링’ 국가대표팀을 부르는 말도 그렇다. ‘의성마늘소녀’는 뜬금없는 호칭이다. 평균 나이 25살을 웃도는 성인 여성들에게 ‘소녀’라니 정말 뜬금없지 않은가. 그들은 분명 최고의 기량을 가진 전문가인데도 전문성이 아닌 나이와 출신 지역을 강조하는 별칭으로 불렸다. 남성 선수들은? ‘빙속 철인’(스피드스케이팅 이승훈), ‘인간 탄환’, ‘황제’(스켈레톤 윤성빈)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힘과 능력, 권위가 강조되는 별칭이다.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슬아 사무국장은 “올림픽뿐 아니라 평소 스포츠 중계에서도 남성 선수에게는 종목의 기량과 능력에 대한 별칭을 붙이는 반면, 여성 선수에게는 ‘요정’이나 ‘진주’처럼 외모 품평적인 요소가 있는 별칭을 주로 붙인다”며 “기혼 여성 역시 선수의 기량을 말하기보다는 ‘엄마’와 ‘주부’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는데, 이런 묘사나 호칭은 전문가를 전문가로서 인정하는 느낌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미디어에서 쓰는 표현일수록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사무국장은 이어 오빠란 호칭에 대해서도 “친족관계 외 사회적 맥락이 붙어 있다”고 덧붙였다.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참고자료 <오빠의 탄생>,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한희성 ‘호칭어 ‘오빠'에 대한 사회언어학적 교육방안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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