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식구들 생각은 안 해요?” 30년 전 대학생 ‘연희’는 울먹이면서 강동원(이한열 열사 역)에게 묻는다. 돌아오는 답은 ‘가슴이 너무 아프다는 것.’ 6·10 민주화 투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 유독 ‘연희’와 강동원이 눈이 시리도록 밟히는 건 빛나는 ‘청춘’이기 때문이다. 청춘만이 세상살이에 무딘 잣대가 아닌 뾰족한 자를 들이대 공감한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청춘. 지금 연희는 아마도 중년의 한가운데에 서서 어쩌면 그날의 젊음을 그리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살 더 먹는 것이 반드시 젊음을 반납하는 일은 아닐 터. 요즘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벗어나 젊게 사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여전히 연희이고 강동원이다. 그들에겐 비법이 있었다.
■ 색칠하면서 나를 찾았어요
지난달 29일, 새해를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의 한 레스토랑이 직장인들로 북적거렸다. 딸랑, 문이 열리고 한경숙(39)씨가 들어왔다. 부챗살 같은 눈주름을 지으며 활짝 웃는 그는 20대로 보였다. 병원의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업무를 10년 넘게 해온 그는 어느 날 돌아보니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더란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젊은 상사’로 통한다. 비법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비결이요?” 반문하면서 그가 내민 건 몇장의 그림엽서였다. 익숙한 서울의 길들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었다. 엽서를 내미는 그의 손길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를 알게 됐어요.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선과 색을 가진 사람인지.”
그는 2016년 가을부터 참여연대의 ‘느티나무 서울드로잉’을 수강했다. 2017년 봄, 가을 시즌까지 합쳐 3회나 들었다. 3개월간 대략 18명이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모여 2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헤어지는 강좌다. 대학생을 둔 장년부터 20대까지, 직업도 교사부터 무직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그는 “페북 친구인 (서촌 옥상 화가) 김미경님의 그림을 보고 막연히 그분처럼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수강 신청을 했다.
삐뚤빼뚤 그린 선도 “다시 그리면 돼요, 괜찮아요”라고 말해주는 강사의 격려에 큰 용기를 얻었다. 같은 장소에서 여러명이 스케치북을 펼쳐도 수강생마다 그림이 달랐다. “다른 이는 이 장소를 이렇게도 보는구나” 하는 생각에 즐거움이 갑절이 됐다. 전시회조차 가본 적이 없었던 그가 붓을 들자 서서히 미세하게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색을 칠하면서 두통이 없어졌고 한때 빠졌던 우울증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세상을 사는 데 작은 창이 열린 것 같았다”는 그는 자신이 매우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요. 그걸 끄집어내는 게 중요해요.” 더 이상 그는 나이가 드는 것이,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는 2018년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누구나 각자의 젊음이 있고, 각자의 열정과 자신의 속도로 사는 게 젊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초등학생 아들에게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며 일어섰다. “그거 아세요? 페북에 제 그림을 올리니 한 웹진에서 연락이 와 재능기부 차원에서 제 그림을 제공하고 있어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자존감이 넘쳤다.
■ 독서모임이 젊음의 유지 비결
“한국 사회는 너무 일찍 사람들을 길들이려고 하는 거 같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것이 너무 많다.”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서희선(48) 부장은 길들여진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재미난 일을 많이 벌인다. ‘정우성 독서클럽’도 그런 일 중 하나.
지난해 초 그는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모여 수다 떠는 모임’을 만들었다. ‘정우성’이 배우 정우성은 맞지만 그의 팬클럽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저 서씨가 정우성을 영입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서희선 부장의 ‘정우성 독서클럽’. 서희선 제공
마음을 굳힌 뒤 10여년간 알고 지낸 이들 17명에게 연락을 했다. 평소 서로 만나기 힘든 분야의 사람들로, 연령대도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게 구성했다. 남녀 비율도 세심하게 고려했다. 대략 6 대 4. 건축가, 음악인, 스타트업 대표, 영화평론가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희선’과 ‘책 읽기를 좋아하거나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달에 한 번 모여 2~3시간, 책과 사는 얘기로 수다를 떨었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 책부터 에스에프(SF) 소설까지 그들의 입에 올랐다. 한번은 서로에게 자신의 ‘인생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낯설었던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서씨는 평소 자신이 잘하는 두가지 ‘책 읽는 것’과 ‘다양한 사람 만나는 것’을 묶자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나와의 약속을 지켜 좋았고, 30대들과 대화해서 좋았고, 나이와 상관없이 여러 주제를 얘기 나눠 좋았고, 사람을 소개해주게 돼 좋았고….” 좋았던 점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해 늙어지지 않는 것”이 젊음을 유지하는 법칙이라고 그는 말한다. 올해도 좋아하는 이 일을 더 확장할 생각이다. 그룹을 2개로 만들고 2주에 한 번꼴로 모일 예정이다. 그리고 그래왔듯이 정우성에게 페이스북을 통해 모임 날과 모임 결과 등의 인증샷을 보낼 생각이다. “왜 정우성이냐고요? 배우 중에서 유일한 페친이라서요.” 활짝 웃는다. 지금이라도 당장 당신의 이웃이든 친구이든 누구든 연락해 책 한권 들고 만나면 서씨처럼 유쾌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아요
에어비앤비 코리아 홍종희(45) 홍보총괄은 자주 출근길에 길을 잃어버린다. 이 간판, 이 담벼락 등을 보다가 “여기가 어디지” 하고 만다. 지난달 29일 저녁 6시30분,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예술공간 라움트. “종희님 오셨네요.” 홍씨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장영돈(33), 문규철(30)씨와 더불어 라움트를 지키는 예술가 3인방 중 한명인 황선정(29)씨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16살. 하지만 황씨는 ‘선생님’도, ‘고모님’ ‘이모님’ ‘총괄님’도 아닌 그저 ‘종희님’으로 부른다. 한국 사회에선 다소 보기 힘든 풍경이다. “전혀, 전혀 기분 나쁘지 않다.” 첫 만남부터 이들은 서로의 나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난해 8월5일 이 둘은 홍씨가 아침마다 하는 출근길 여행에서 만났다.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고 싶어서” 그는 10분이면 도착할 지하철역을 30분 넘게 걸려 닿는다. 매일 20분 넘게 동네를 여행한다.
몇년 전부터 외국의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는 여행을 해온 그는 “여행을 통해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을 한 후 그 즐거움을 고스란히 일상에 가져오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곶감 빼먹듯이 여행을 자주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20분 출퇴근길 여행법’을 만들었다. 20분 일찍 집을 나서고 20분 늦게 들어가는 여행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골목길 여행을 하다가 울긋불긋한 포스터가 걸린, 이전엔 본 적 없는 공간 라움트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쑥 들어가 선정씨를 만났고 친구가 됐다. 마치 여행지에서처럼 말이다.
사진 왼쪽부터 홍종희 총괄, 문규철, 장영돈, 황선정.
‘예술가들의 공존지를 넓혀가자’는 취지의 공간 라움트엔 미디어아트, 그림, 영화제 등 젊은 창작자들의 거대한 도발이 뿜어져 나온다. “올 때마다 이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좋은 영감은 회사와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일상을 탈출하는 기분을 선사한다.”
나이가 들면 머뭇거림이 많아진다. 호기심도 줄어든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만은 다르다. 모든 것이 처음인 어린아이처럼 돼 두 눈이 반짝거린다. 날마다 여행자처럼 사는 홍씨 얼굴엔 늙음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늙는 걸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는 좀 천천히 늙어갔으면 하고, 정신적인 젊음은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게 소망이다.” 올해도 그의 호기심은 새로운 여행지를 물색하고 있다. 아마도 새 여행지는 ‘재즈’가 될 모양이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재즈바에 들어갔다가 내 취향과 재즈가 맞는 걸 알았다. 취향 하나를 가지니 낯선 이와의 만남도 두렵지 않고 삶이 달라졌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Youthful life
사회적 나이보다 젊게 사는 삶의 방식.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고 애쓰며, 다양한 취미생활로 자신의 인생을 즐긴다. 피티(PT) 같은 근육 운동을 비롯한 건강관리는 필수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나이를 ‘0.7 곱하기 계산법’으로 산출하기도 한다. 현재 나이에 0.7을 곱하면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나이가 된다.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액티브 시니어’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