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거절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라면 부탁 훈련을 통해 거절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픽사베이
‘지금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회사원 이은주(가명·35)씨는 문득 자신이 ‘호구’가 아닐까 싶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기는커녕 남에게 부탁을 하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소심녀다. 지금도 그는 친구가 부탁한 책을 디자인하느라 잠도 못 자고 뻘뻘대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정작 자신도 대학원 기말 리포트 제출 기한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앞으로 며칠간 잠을 설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후회가 밀려온다. “급히 백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친구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탓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씨 같은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당신도? ‘X’(NO. 싫다)라고 말하면 꺼림칙한가. 거절하면 상대방이 상처 입지 않을까 하는 걱정, 관계가 틀어질까 하는 두려움부터 느끼는가. 불행하게도 이런 경험은 살아가는 동안 꽤 자주 경험한다. 능력, 시간, 돈, 여건이 된다면 무슨 문제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남들의 부탁을 해결해주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다면 문제다. 처방이 필요하다.
거절하지 못하는 두려움, 악순환 근원
왜 우리는 거절을 못할까. <죄책감 없이 거절하는 용기>를 쓴 미국의 심리학자 마누엘 스미스는 “사람들이 타인의 비판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절을 못한다”고 분석한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신경영아카데미 문요한 대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거절을 당하거나 고립, 소외, 단절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존재“라며 “거절을 못하는 데는 집단주의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의 특수성도 한몫한다”고 말한다. 특히 다른 나라와 달리 상명하복 문화와 권위주의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거절로 인한 가족과 친척, 직장 내에서의 고립과 배제, 불이익에 대한 공포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거절 때문에 상대방이 큰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거절당함으로 인한 내 상처가 크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거절할 용기를 못 내는 것이다.
이은주씨 역시 “나의 기분이나 감정보다 상대방이 거절로 느낄 감정부터 고려했었다”고 토로한다. 그는 “일이나 당직을 대신 해달라는 회사 동기, 수시로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 매일 술자리를 강요하는 임원 등의 요구들이 내 일상에서 1순위에 있었다”며 “거절하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왕따 당할까봐 불안해 ‘노’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신 이씨에겐 피로감과 자괴감, 스트레스만 쌓였다.
거절 자체보다 그 태도가 더 큰 상처
하지만 실제 부탁한 당사자가 상처를 받는 원인은 거절 자체가 아니라 거절에 대한 태도일 때가 많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거절하거나 모욕적인 언어를 쓰는 경우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듯이 하찮다는 말투로 기분 나쁘게 거절하면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상대방의 부탁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문 대표는 “내가 무언가 요청하고 부탁할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기본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 뜻대로 ‘거절’할 수 있으려면 용기, 내성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절을 당해볼 필요가 있다. 거절에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절당하기 연습>을 쓴 지아 장은 수줍음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거절에 대한 내성을 다지기 위해 ‘100일 거절 프로젝트’를 실행한 그는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됐다”며 “거절 뒤에 숨어 있던 기회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문요한 대표 역시 “거절에 대한 두려움부터 없애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람의 존재를 거절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제안’이나 ‘상황’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 문 대표는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거절당함으로써 인간관계 자체가 끊긴다는 공포감을 갖고 있다. 본인이 그렇게 생
각하니까 남의 부탁도 상대방이 싫어하고 상처받을까 염려해 거절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거절의 순간, 남이 아닌 내 처지에서
거절의 순간에 ‘남’이 아닌 ‘나’부터 생각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내 행복을 위해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내 감정과 의견, 가치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게 결코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에서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거절과 부탁,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까?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거절과 부탁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고 지적했다.
마누엘 스미스는 “원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한 일의 이득과 결과를 스스로 가늠해야 한다. 싫다면 거절하라”고 조언한다. “당신이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무척 아끼는 사람과의 갈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조직적인 태도를 버리고 상대방의 자존심과 존엄을 훼손하지 않고서 당신의 욕구를 당당하게 주장해보라”라는 것이다.
부당한 타인의 평가에는 어느 정도 둔감해질 필요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받게 되는 불이익이라면 감수해야 마땅하나, 타인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불평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선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평소 부탁 훈련 하면 거절도 쉬워져
평소 ‘거절’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면, 부탁 훈련을 통해 거절에 둔감해지도록 해보자. 처음부터 거절 훈련을 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평상시 주변의 지인에게 사소한 부탁을 하되 ‘내 부탁을 상대방이 거절할 수 있다. 그에게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되뇌는 연습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당신 역시 지아 장이 경험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탁을 잘 들어주고, 상대방이 거절하는 것이 자신을 싫어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도 거절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거절한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틀어질 계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 ‘거절 때문에 나에 대한 평가가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다음 실전에서 거절의 권리를 잘 누리려면 자신의 처지와 형편, 능력과 여유(시간·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잘하고 못하는 것,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 자신이 해도 되는 일인지 깨닫는 것이 급선무다. 만약 자신이 감당할 능력을 벗어나거나 시간과 비용을 많이 투자해야 하거나 시간이 촉박하다면 거절하는 것이 옳다. 물론 부탁을 하는 상대방의 처지도 고려해야 한다.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최대한 부탁을 들어주려 노력해야겠지만 다른 의도가 있다면 거절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자, 이제 자신 있게 거절합시다! ‘노’(X) ‘노’(X) ‘노’(X).
X
엑스. 알파벳 24번째 글자. 알 수 없는, 잘 모르는, 미지의 무엇을 뜻한다. 수학에서는 방정식의 해를 구하려는 문자, 미지수로 ‘X’를 사용한다. 미제 사건을 엑스파일(X-file)로 표기할 때도 여기에서 파생한 의미라 하겠다. 로마자 ‘X’는 숫자 ‘10’을 상징하며 거절(NO)의 의미로 ‘X’를 쓰기도 한다. 두 수의 곱셈 기호 ‘X’로, 컬래버레이션(협업)의 의미도 있다. 사회·이념 문제보다 개인의 삶과 멋, 개성을 중시하는 과거 신세대, 즉 1970년대생·90년대 학번을 ‘X세대’로 통칭하기도 한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