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이정국 기자가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지하 스크린 테니스장에서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 임경빈, 장소협찬 테니스팟
“아이, 젠장. 오늘도 영하 8도라고? 친구들이랑 등산을 가려고 했는데, 취소해야겠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이귀찬(40·직장인)씨가 휴대폰 알림으로 온 ‘날씨’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친구들과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얘들아, 미안해. 오늘 모임 못 나가겠다. 감기 몸살이 와서.”
메시지를 남긴 뒤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 이귀찬씨는 “으미, 좋은 것”이라며 쾌재를 부른다. ‘겨울엔 찬 바람 안 쐬고, 실내에서 따뜻하게 있는 게 최고여~.’
비단 이귀찬씨뿐일까. 요즘처럼 추운 날씨엔 겨울잠을 자는 변온동물들처럼 행동반경이 평소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추운 날씨에 찬 바람을 맞으며 쏘다니는 것이 싫어 무조건 ‘실내’를 외치는 이들.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다. 지상이 아닌 땅속 지하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문화·여가 공간들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코엑스, 타임스퀘어, 아이에프시(IFC)몰, 스타필드 등 쇼핑·먹거리·볼거리(극장) 등이 결합한 지하 복합쇼핑문화 공간들이 아닌 한 발짝 더 진화한 개념이다. 지하 양궁장이나 테니스장, 스트레스 해소방이나 브이아르(VR) 카페, 블라인드 레스토랑, 런닝맨 체험관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색다른 공간에서의 놀 것, 즐길 것, 볼 것 등이 넘쳐난다. 집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이런 이색적인 공간을 방문하거나 체험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물론 기분 전환에 건강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실제 한국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 조직 내에서 치열한 경쟁은 물론이고 절대적인 노동시간도 연간 2241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다. 성인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9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최하 수준이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송선미 부연구위원이 낸 <스트레스 관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적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인의 75%가 일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들의 스트레스 해소, 분노 관리 등이 중요해졌다.
반면 이귀찬씨처럼 집에 있어봤자 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늘어나는 건 잠과 체중뿐이지 않겠는가. 이불 안에서 리모컨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하지만 그 뒷감당은 어떻게? 친구, 가족, 연인과의 색다른 데이트는 포기해야 하며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다 보면 머리가 띵하고 도리어 온몸이 쑤시지 않는가.
그래서 ESC가 준비했다. 겨울철에도 ‘따뜻한 실내 공간’만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위해 지하에서 즐길 만한 이색적인 공간을 직접 탐방했다. 흔해 빠진 술집과 노래방, 당구장 등 먹고 마시고 노는 유흥의 공간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며 땀과 스트레스를 배출하거나, 미술품 관람 등 문화생활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힐링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이다.
지난 일요일, 안타깝게도 이귀찬씨의 평온했던 오전은 30분도 채 안 돼 끝났다. 김생기씨가 올린 단톡 메시지가 화근이었다. “등산을 하기엔 너무 쌀쌀한 날씨지? 그럼 골프, 야구, 볼링, 테니스, 양궁 같은 걸 해볼까? 최근 지하에 테니스와 양궁을 할 수 있는 곳도 생겼다네. 아님 런닝맨 체험을 해보거나.”
그 방에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정말?” “좋다” “집에 있으면 뭐 해, 얼굴도 볼 겸 운동이나 하자” 등 격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이귀찬씨는 30분 만에 밖으로 끌려나왔다. 향이 좋은 커피 등을 파는데다 카페처럼 꾸며 입소문이 난 양궁장에 가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귀찬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솔직히 기대는 안 했어요. 마지못해 도살장에 끌려나오는 돼지처럼 나왔을 뿐. 해보니 조금 놀랐어요. 확실히 기분이 좋아지고,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거든요. 연말연시여서 평일 술자리와 모임도 많아 몸이 둔해진 상태였는데, 몸을 좀 움직이고 나니 한결 가벼워져 여러모로 좋았습니다. 굳이 집에만 있겠다고 고집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고요.”
이귀찬씨와 그의 친구들은 이번주 일요일에도 집이 아닌 ‘밖’에서 회동을 하기로 했다. 굳이 찬 바람을 맞지 않아도 되는, 지하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추위를 이겨보기로 한 것이다. ‘기분 전환!’ 이귀찬씨는 휴대폰 일정표에 이렇게 남겼다.
※ 글에 등장하는 이귀찬과 김생기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Underground
땅속, 지하를 통칭. ‘지상’이 복잡해지면서 ‘지하’를 활용한 대중교통, 복합상가 및 근린시설 등이 급속히 확대되는 추세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의미하기도 하며, 반체제 활동 조직이라는 뜻도 있다. 방송에 나와 대중성 짙은 음악을 하는 사람(오버그라운드)과 달리 클럽 등 소규모 공연을 선호하며 소수의 마니아층에게 알려진 뮤지션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칭하기도 한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