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9일 개관과 함께 진행됐던 ‘역사갤러리 특별전’ 및 개관 기획전 ‘여의도 모더니티’ 전시 당시 세마(SeMA) 벙커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한다. 2015년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에 이어 지난 10월21일부터 11월26일까지 한시적으로 시민에게 개방됐던 지하 공간인 경희궁 방공호, 신설동 유령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세곳 중에 여의도 지하 비밀벙커는 10월19일 서울시립미술관 ‘세마(SeMA) 벙커’로 정식 개관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나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둥근 지붕이 열리면서 마징가 제트(Z)가 나온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뒤늦게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됐지만, 가끔 ‘정말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위기 상황에 피신하기 위해 만든 지하 비밀벙커가 여의도에 실재했던 것처럼.
여의도 환승센터 마포대교 방향 보도 바닥에는 커다란 철문이 있다. 지날 때 커다란 쇳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아래쪽이 뻥 뚫려 있다는 짐작이 가능하다. 10여년 전부터 이곳을 이용할 때마다 궁금했다. ‘지하 비밀벙커’가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 접근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었으니까. 혹시 여기에 마징가 제트가 있는 걸까?
그 궁금증은 최근에야 풀렸다. ‘서울시립미술관 세마 벙커’ 표지판이 그 앞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만들어진 지하 비밀벙커이고, 2005년 5월 여의도 버스환승센터 건립공사 도중 발견되었다’는 사실까지 친절하게 표지판에 새겨져 있다. 이곳이 바로 ‘지하 비밀벙커’로 내려가는 입구였던 것이다. 여의도에 지하 비밀벙커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이곳이 전시·문화공간으로 재단장했다는 사실은 더욱 신기하고 생소했다. 도대체 어떻게 바뀌었을까? 발견 당시 무릎까지 물이 차 있었고, 어둡고 습하고 쾨쾨한 이 공간에 각종 예술품을 전시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2015년 시민체험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했기에 궁금증은 증폭됐는데, 반갑게도 10월19일 ‘역사갤러리 특별전’ 및 개관기획전 ‘여의도 모더니티’를 시작으로 정식 개관 소식을 알렸다.
서울 여의도 버스환승센터에 위치한 세마(SeMA) 벙커 출입구.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오, 가봐야지!’ 다행히 세마 벙커는 수시로 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여의도 환승센터라 교통이 편리하고, 관람료도 무료여서 점심시간을 활용해도 충분히 방문이 가능했다. 실제 직장인들이 이 시간을 이용해 들르는 모습도 종종 목격됐다. 개막전은 여의도의 지역적 특색을 살려, 강예린 등 10여명의 작가가 참여해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을 수직과 수평, 과거와 현재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 색달랐다. 송가현 큐레이터는 “앞으로도, 상대적으로 문화예술 인프라가 부족한 여의도에 특화된 복합 문화예술 공간을 지향함으로써 여의도를 찾는 이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선도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관 내부에서 ‘지하 비밀벙커’를 기대했다면, 첫 방문 때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곳이 지하 비밀벙커였나 싶을 정도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총 871㎡(263평)에 달하는 이 공간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사시 요인 대피용 방공호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화장실과 샤워장을 갖춘 66㎡(20평) 브이아이피(VIP)실과 지휘대 495㎡(150평), 기계실이 있는 수행원 대기실 33㎡(10평)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럼에도 전시공간으로서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게 꾸며져 있었고, 지하 공간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쾌적하고 따스해 놀라웠다. 오히려 지상이 아닌 ‘지하’ 공간에서 주는 아늑함이 더 크게 와닿았다. 특히 아이에프시(IFC)몰 쪽 보도 쪽에 설치된 승강기 2대를 통해 출입이 가능하고, 승강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복도를 지나면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렇다면 발견 당시 지하 비밀벙커의 모습은 어땠을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난달 27일, 서울시립미술관에 양해를 구한 뒤 이곳을 다시 찾았다. 개막전 전시가 막 끝나 철거가 한창이었다. ‘와~’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보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공간은 전시 관람을 위해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박승연 코디네이터는 “소파, 변기 등을 그대로 두고, 발견 당시의 사진도 역사갤러리(VIP실)에 전시해 가급적 원형 보전 형태를 유지하고자 했다”고 했다.
10월19일 개관과 함께 진행됐던 ‘역사갤러리 특별전’ 및 개관 기획전 ‘여의도 모더니티’ 전시 당시 세마(SeMA) 벙커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0월19일 개관과 함께 진행됐던 ‘역사갤러리 특별전’ 및 개관 기획전 ‘여의도 모더니티’ 전시 당시 세마(SeMA) 벙커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0월19일 개관과 함께 진행됐던 ‘역사갤러리 특별전’ 및 개관 기획전 ‘여의도 모더니티’ 전시 당시 세마(SeMA) 벙커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숨겨진 ‘지하 비밀벙커’가 아닌 상설 전시·미술관이다. 365일 전시가 열릴 때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12월7일부터 2018년 1월21일까지는 두번째 기획전인 ‘비전 온 비전: 르메트르 비디오 컬렉션’이 열린다. 1990년대 이후 싱글채널 비디오와 실험영화를 수집해온 프랑스의 개인 컬렉터인 ‘르메트르 부부’의 컬렉션으로, 150여개의 비디오 아트와 10여개의 영화 등을 만날 수 있다. 송가현 큐레이터는 “르메트르 컬렉션은 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에서 비디오 작품에 대한 새로운 접목과 시도를 통해 작가와 컬렉션이 함께 성장을 이뤄낸 개인 소장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며 “8일 오후 4시에는 르메트르 부부와의 대담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말했다.
어쨌건 한시적으로 개방한 경희궁 방공호, 신설동 유령역과 달리 다크투어의 한 공간인 세마 벙커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다. 서울시는 경희궁 방공호와 신설동 유령역도 시민의 의견수렴을 거쳐 2018년 중장기 활용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떤 모습으로 ‘짠~’ 하고 나타날까.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 하루빨리 누구나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돼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Underground
땅속, 지하를 통칭. ‘지상’이 복잡해지면서 ‘지하’를 활용한 대중교통, 복합상가 및 근린시설 등이 급속히 확대되는 추세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의미하기도 하며, 반체제 활동 조직이라는 뜻도 있다. 방송에 나와 대중성 짙은 음악을 하는 사람(오버그라운드)과 달리 클럽 등 소규모 공연을 선호하며 소수의 마니아층에게 알려진 뮤지션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