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거 알아요? 미역도 섹스를 한대요”, “미역이… 해?” 티브이엔(tvN) 드라마 <아르곤>에 나오는 대사다. 미역보다 못한 신세를 한탄하는 와중에도 미역은 해조류가 아닌 갈조류라고 정정하는 시사프로그램 10년 차 작가 육혜리(박희본)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웃긴 했지만, 십년 세월을 보도국에서 변변히 연애도 못 하고, 짬이 나도 혼자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서른다섯살 여자의 일상이 순식간에 이해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데이트든 섹스든, 일종의 교제 기회가 줄어들다 보면 쭉 이렇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축소해버린 욕망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돌보는지 궁금해졌다. 정이듬(34, 가명, 박사과정 대학원생), 양은영(33, 가명, 콘텐츠기획자), 김진아(43, 개인사업자 겸 울프 소셜클럽 운영), 유선주(41, 드라마 칼럼니스트) 등 30~40대 싱글 여성 네 명이 사랑에 대한 수다를 서울 이태원동 만남 공간 ‘울프 소셜클럽’에서 나눴다.
유선주(이하 유) 40대 비혼 여성인 친구들 만나면 “남자 어디서 만나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어디서 만나나?
양은영(이하 양) ‘여초업계’로 직장을 옮긴 뒤부터 ‘데이팅 앱’을 이용했다. ‘정오의 소개팅’(회원 100만명이 넘는 데이팅 앱)은 프로필과 사진을 내야 활동이 가능하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남자를 매칭해주는데 남자들은 일단 성의가 없다. 사진이 특히 그렇다. 몸 자랑하는 사진은 구운 고등어 같다. 학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그것만 상세하게 써놓더라.
김진아(이하 김) 학력만 보고도 연락을 하나?
양 학력 자랑하는 이에겐 매력을 못 느낀다. 가볍게 만날 셈이라도 프로필 사진이 비호감이면 만나기를 꺼리게 된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거 같다. 얼굴이 안 뜨는 채팅 앱에서 조건 등을 적어놓고 반응이 온 사람 중 선택하는 편이다.
김 ‘인스타그램’에서도 많이 만난다고 하더라. 사진을 많이 올리는 사람끼리 만나기도 하고. ‘셀카’를 많이 올리는 여자들을 팔로하는 남성들이 많다.
유 채팅 앱 ‘틴더’를 깔았는데 잘생긴 남자를 봤다. 하지만 ‘좋아요’를 못 누르겠더라. 나도 모르게 잘생긴 얼굴보다는 만나도 안전할 거 같은 얼굴을 찾더라. 내 얼굴 사진 대신 술안주로 먹던 회 사진을 올린 적 있다. 그랬더니 수족관 광어 사진을 올린 이가 나한테 ‘좋아요’를 누르더라. 웃기잖아. ‘슈퍼 좋아요’를 눌렀지. 미남에겐 안 눌렀다.
정이듬(이하 정) 얼굴 사진을 보면, 그가 어떤 대화 패턴을 가졌을지 상상이 된다. ‘노잼’이 예측이 되기도 하고. 골프, 자동차 사진 올린 이와의 대화는 30분도 못 견딜 거 같다.
유 어떤 남자는 턱시도를 입었는데, 분명 결혼식 사진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 30대 초반엔 주로 소개팅을 했는데, 만나 보면 정말 어이없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이 결혼하기 싫은 이유를 왜 얘기하는지 모르겠더라. 처음 본 여자에게 호감을 사는 법을 모르는 거다. ‘내가 이렇게 돈이 많은 형님을 알아’, ‘나 준연예인과 술 먹었어’, ‘나 이런 여자들을 소개받았었어’. 이런 얘기들은 어떻게 해독해야 하지?
김 여자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는 이미 그들의 화법에서 나온다.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하면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다.
정 듣다 보면 성매매에 대한 단서인 경우가 있다. ‘누가 자기한테 섹스를 잘한다고 했대’ 같은 말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친밀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내 생각으론 성매매에서 들은 소리가 분명하다.
양 대화를 하면서 항상 알아보는 게 있다. 남자들이 ‘너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티브이 보는데 너는 무슨 프로그램 좋아하냐’고 되묻는다. ‘개콘’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일동 웃음) 답장 안 한다.(<개그콘서트>는 종종 여성의 외모 등을 소재로 다룬다) 개인적 경험으론 그런 이들은 콘돔을 안 쓰려고 한다.
정 지난해 만난 외국인은 ‘내 숙소에 가면 내 콘돔이 있어’라고 하는데, 그게 너무 신선했다. 한국 남자들과는 입씨름해야 한다.
유 섹스하기 전에 서로 ‘안전이 기본’이란 점을 어필하는 건 당연한 거다. 남자가 그러면 오히려 안심된다.
정 초면인 여자를 만났을 때 남자는 자신이 무해한 사람이고, 너한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기나 하니?’라고 말해주고 싶은 남자들이 너무 많다.
김 여성에게 ‘나는 섹스킹! 나 잘해!’만 강조하는 이는 한심하다. 상대의 생각 같은 건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정 실제 (섹스를) 잘하는 이들은 그런 말 안 한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면 의심을 해봐야 하는 거 있잖아?(일동 웃음)
김 회사원일 땐 클럽을 많이 다녔다. 지금은 내 공간(울프 소셜클럽)으로 사람들이 모이니까,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 중 선택한다. 관계가 안전한 편이다.
정 20대 중반 홍대 클럽 갔을 때 경험이다. 한 남자가 별 대화 없이 자신의 대학(명문대) 자랑하면서 데이트하자고 했는데 너무 웃겼다.
양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 보다가 학생증 받은 적 있다. ‘나 이상한 사람 아니다’라면서 주더라. 소위 말하는 스카이(SKY)였는데 얼굴이 호감이 갔지만 한심해 보였다.
김 자신이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게 트렌드인가 보다.
유 학벌이 ‘안전한 사람’의 보증수표는 될 수 없다.
양 재개장 전 (삼성동) 코엑스몰 앞엔 광장이 있었다. 여자 혼자 있건, 여럿이 있건 남자들은 말을 건다. 대기업 사원증을 보여준 남자도 있었다.
정 (만남이) 망한 얘기는 끝도 없네.
김 3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이듬, 은영은 결혼이나 배우자에 대한 기대가 있나?
양 헤어졌을 때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 직장 동료나 학교 친구와 연애하면 그게 힘들다. 그래서 지금 남자친구는 ‘데이팅 앱’에서 만났고 결혼도 고려한다. 남자친구는 ‘우리 함께 오래 살아야 하니까 자궁경부암 백신 같이 맞자’고 한다. 콘돔도 잘 챙겨온다. 믿음직스럽다.
정 30대 초반에 선을 봤는데 예비 전업주부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예쁘게 아기만 키우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어서 그 남자가 싫다는 거야’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한테 전혀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 아니었다. ‘졸업하면 뭐 하실 거예요’라고 묻는 남자들도 있었다. 내가 대학원 다니며 공부를 하는 사람이란 것엔 관심 없다. 심지어 ‘돈을 안 벌지만 똑똑한 자식을 낳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보인다. 그런 남자들에게 질려서 지난해 친구와 제대로 된 이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다닐 만한 스포츠센터들을 다 써봤다. 클라이밍, 자전거, 수영, 춤 등.
유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선 달리기 동호회에서 만나더라.(웃음) 현실엔 없다. 40대 비혼인데 직업이 불안정한 상황이면 생계 고민이 우선이다. 아예 장기적인 파트너를 바라지 않게 된다. 그냥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끼리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정도만 기대한다.
정 어느 순간부터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애매해졌다. 내 또래 여자들의 상이라는 게, 드라마로 치면 골드미스 아니면 엄청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극단적인 모습뿐이다. 대학원 다니며 더러 수입도 생기고, 여러 분야에 관심도 많은데. 한마디로 나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가는 싱글 여성의 삶에 대한 상이 업데이트돼야 한다.
유 사회적 성공, 연애 다 성공한 여자를 다룬 드라마가 유행한 적 있다. 그 주인공과 같이 나이 든 이들이 지금 40대 중반이다. 가난한 비혼 여성들이 많다. 사는 게 드라마 같지 않다.(웃음)
김 30대엔 지금과 같은 경제력과 사회적 능력 있으면 쭉 잘살 거로 생각했다. 동년배 남자들이 다들 그러니깐.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흔 되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갑자기 일이 줄어 수입도 줄고. 드라마엔 그 이후의 삶은 나오지 않는다.
정 똑같이 취업을 못 한 박사라도 남자는 ‘쟤가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아서 어째’라고 하면서 돈 되는 일, 이름을 알릴 만한 일을 몰아준다. 여자는 외국에서 박사를 따 와도 미혼이면 미성숙한 존재 취급하거나 모임의 간사 같은, 주연이 아닌 보조 역할만 준다.
유 전문직 여자는 동년배 남자들이 전성기를 맞는 나이에 업계에서 사라진다. 지금은 가난을 불편해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체면 뒤에 숨는다. 30~40대 여자들이 뭐 먹고 사는지, 무슨 어려움을 겪는지 잘 드러나지 않게 된다.
정 하다못해 배우 문소리도 마땅한 역할이 없어서 자기가 영화를 찍는 판이다.
김 연령대별로 특정한 이미지만 소비된다. 저 나이대 여자들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섹스한다는 식이다. 정말 낡았다.
유 40대쯤 되면 실패한 경험들이 쌓이고 이것저것 해봤기에 더 까다로워진다.
양 내 남자친구는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내가 무슨 얘기 하면 잘 듣는다. 체구도 나와 비슷하고. 책을 열심히 읽는 점도 좋다.
정 망가지지 않은 남자를 지인으로 두면 세상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어. 관심사가 같은 이를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 결혼 아니면 포기, 이런 극단적인 선택 말고 다른 형태로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면 좋겠어.
김 억지로 짜맞추는 만남 말고, 공간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만남을 제공하고 싶다.
유 불안의 근원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두려움이 있다. 고립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일대일 파트너를 두지 않는 삶을 선택하기가 수월하다.
정리 유선주 드라마 칼럼니스트 oozwis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