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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지리산 폐가에선 무슨 일이?

등록 2017-10-18 19:50수정 2017-10-18 20:44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일러스트 이민혜
일러스트 이민혜

예전에 봤던 만화 중에서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게 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다들 뭘 떠올릴지 궁금하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란마 1/2>을 고르겠다. 만화가 다카하시 루미코가 그린 <란마 1/2>이 한국에 소개된 건 1990년대 초였다. 해적판 만화보다는 ‘대영팬더’에서 수입한 애니메이션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찬물을 뒤집어쓰면 여자로 변하는 란마, 판다로 변하는 겐마, 고양이로 변하는 샴푸, 오리로 변하는 무스, 이 만화를 통틀어 최고수인 코롱 할멈과 할멈의 라이벌 팔보채 영감까지. 아아, 떠올리니 그립네. 그래서 방금 유튜브에 들어가 주제곡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고 오는 길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최애’(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찬물을 뒤집어쓰면 아기돼지로 변하는 요가(원작에서는 ‘묘가’)였다. 요가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란마 1/2>을 한번이라도 본 형제자매님들이라면 머릿속에 선연히 아로새겨져 있으리라. 요가는 격투 라이벌인 란마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승부를 벌이기로 약속하지만 결투 장소를 찾지 못해서 헤매다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사흘 밤낮이 지난 후였다는 이야기. 결투 장소가 자기 집 뒤에 있는 공터였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오히려 상대가 도망친 거라 여기고 중국으로 떠난 란마를 쫓아가지만 거기에서 또 길을 잃고 마는데. 그렇다, 요가는 희대의 방향치였던 것이다. 급기야 자기가 살고 있는 집도 찾지 못하는 바람에 란마가 알려주곤 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코믹함을 넘어서 진지하게 그를 동정하고 싶어진다.

길치 캐릭터 요가와 비슷한 철수
지리산 등반길 동행

내가 요가에게 감정이입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친구 중에 요가와 흡사한 인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그의 사회적 체면을 좀 고려해주자는 차원에서 실명을 쓰기는 그러니까 일단은 철수라고 해두자. 철수의 취미는 등산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전국의 산이란 산은 다 올랐다고 한다. 한겨울 산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심지어 유일하게 구독하는 잡지는 <월간 산(山)>이다. 산이라면 나도 그럭저럭 좋아해서 학교에 다니며 친하게 지낼 때는 철수를 따라가곤 했다. 그는 확실히 산을 잘 탔다. 체력도 좋았다. 장비를 다루는 요령도 훌륭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처음 동행했을 때는 실수이겠거니 여겼는데 몇번인가 같이 길을 나서며 깨달았다. 실수의 차원이 아니었다.

백이면 백, 길을 잃는다. 어린애도 똑바로 갈 수 있는 외길에서, 어째선지 철수가 앞장을 서면 같은 자리를 맴돌게 된다. 아니, 그가 뒤에 서도 마찬가지였다. 길은 곧은 외길이다. 하지만 나무에 표시를 새기고 조금 걷다 보면 똑같은 표시가 새겨진 나무가 앞에 보인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길 양쪽은 죄다 잡목림이라 갈림길도 없어서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섰는지조차 알 수 없다. 분명히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라 여기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하산코스를 따라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철수의 끔찍한 방향감각은 동행한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듯했다. 덕분에 한두 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에 도착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린 적도 있다. 그나마 목표 지점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번번이 뜻밖의 장소에 발을 디디고 만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아직 철수의 저주받은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던 무렵의 일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지리산에 오른 적이 있다. 지금이야 불법이라서 과태료를 물지만 당시만 해도 지리산 정상에서는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내는 일이 가능했다. 누군가로부터 거기에 가면 건강한 자매님들과 즐겁게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우리는 나름대로의 낭만적인 방학을 보내자는 희망에 들떠 산행 계획을 세웠다. 돌이켜보면 한심해서 혀라도 깨물고 싶지만 뭐 다들 그런 경험 한 자락씩 있지 않나. 가진 건 튼튼한 신체뿐이었던 철수와 나는 각각 큰 배낭에 텐트와 기타까지 나누어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뱀사골에서 출발하여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에서 1박을 할 작정이었다.

계절은 여름, 아침부터 날씨는 쾌청해서 산에 오르려는 이들은 많았다. 우리는 초입에서 국밥을 한 그릇씩 비우고 그들을 따라 걸었다. 곳곳에 설치된 이정표와 설치물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뱀사골이라는 곳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뱀사골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배암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배암사골’이 변해서 굳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뱀과는 무관한 것이다. 한편 송림사의 주지스님이 칠월칠석 밤만 되면 사라져, 이를 조사하던 서산대사가 새벽녘에 큰 뱀을 발견하고 따라가 보니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죽어 있었고 그 뱃속에서 주지스님이 시체로 발견되었더라는 건 낭설인 모양이지만 나는 후자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느 순간 인적이 드물어져
산에 어둠도 내리기 시작

과연 이름난 골짜기답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절경이 펼쳐졌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계곡 물가에서는 단체로 엠티를 온 듯한 학생들이 몸을 담근 채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쟤들은 다 짝을 맞춰 왔네.” 그곳을 지나며 철수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게. 아마 여기서 놀다가 내려가겠지.” 내가 대답했을 때 그중 한 명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자기들이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으려고 재료를 준비해 왔는데 깜빡 잊고 코펠을 챙기지 못했다, 잠시 빌려주면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겠다는 얘기였다. 마침 우리도 쉬어 가려던 참이어서 흔쾌히 빌려주었다. 덕분에 우리 몫의 비빔국수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후루룩후루룩 잘 먹고 그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기다렸다가 코펠을 챙긴 후에 우리는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헤맨 건 그즈음부터였다. 분명히 코스를 제대로 따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인적이 뜸해졌다.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든 거 아니야?”라고 내가 묻자 철수는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아, 조금만 가면 다시 나오겠지.” 그러나 괜찮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거친 산길만 나타날 뿐이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긁히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우리는 입을 꾹 다물고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몸에 열이 오르고 다리는 무거워졌다. 숨이 가빠왔다. 그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 일이 잦았다. 물을 아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갈증과도 싸워야 했다. 짊어진 기타를 계곡 아래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급기야 녹초가 돼서 땅에 한번 엉덩이를 붙이면 일어서기도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고 직감한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주위가 캄캄해졌을 무렵이다. 걸을수록 숲이 빽빽해져서 한 발짝씩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해가 지자 랜턴을 꺼냈다. 이제는 돌부리와 나무에 걸려 넘어질 걸 걱정해야 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계속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자칫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솟았다. “차라리 여기서 비박을 하고 아침 일찍 출발하는 편이 낫겠는데.” 애써 들고 온 텐트는 무용지물이었다. 지금 상태라면 폴대를 연결하는 것조차 어려울 듯했다. 하는 수 없지. 우리는 대충 평평한 곳을 골라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그 와중에도 뱀에게 물릴까 싶어서 담배를 가루로 만들어 주위에 뿌리는 걸 잊지 않았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비박이라 겁이 났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의 울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뭐야, 산짐승인가. 철수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가만히 랜턴을 비추었다. 그것은, 닭이었다. 크고 하얀 닭 한 마리가 멀찌감치 서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닭 아니야, 저거?” “맞는 것 같은데.” “닭이 왜 이 산중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닭은 반대쪽을 향해 깨금발로 뛰듯 톡톡 움직였다. 내가 멈추자 다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아래위로 까닥거린다. 마치 손짓하는 것처럼.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이 닭을 따라갔다. 근처에 누군가 기거하며 기르는 닭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었다. 대략 이삼분쯤 걸었을까. 눈앞에 작은 집이 하나 나타났다. 딱 보기에도 폐가였다.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집 안의 모습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공기가 나쁜 냄새를 품은 채 고여 있었다. 천장에는 온통 거미줄투성이였다. 마루 위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가구라고 부를 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밖에서 한뎃잠을 자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우리는 짐을 옮기고 버너와 코펠을 꺼냈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요량이었다. 팩소주도 몇개 가져왔으니 마시고 죽은 듯이 잠드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물이 끓는 동안 나는 멍한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다행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닭 한마리 따라 폐가 도착
천장에서 노려보는 얼굴들

그때, 문득 누군가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럴 때 있잖은가.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뒤통수가 따끔따끔해서 돌아보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째려보고 있더라는. 집의 벽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허술한 구조라 여기저기 틈새가 있었다. 나는 무심한 척하며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게 한둘이어야지. 예를 들면 어떤?” “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거나.” “이 상황에서 굳이 그런 말이 하고 싶냐?” 미안 농담이야, 라고 말하려는데 거미줄이 쳐지지 않은 천장의 한쪽이 눈에 들어왔다. 랜턴으로 비춰보니 그 속에 사람 얼굴처럼 생긴 문양이 있었다. 주위를 더 자세히 둘러보자 벽과 바닥, 천장에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무늬가 가득했다. 노인 얼굴, 아이 얼굴, 젊은 여인의 얼굴에 화난 도깨비 형상의 얼굴까지. 누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은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잠이 확 달아났다. 자연적으로 이런 게 형성될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걸까. 그러고 보니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닭은 대관절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쯤에서 약간 궁금해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야마시로 아사코의 소설 <엠브리오 기담>에서 확인해주시길.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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