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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보다 무서울 순 없다

등록 2017-08-02 19:53수정 2017-10-30 11:47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사회과학 잡지와 단행본을 만드는 곳이었다. 사무실은 지하철 3호선 불광역에서 가까웠다. 제대한 후로 학교 근처에서 쭉 자취를 해왔으니 이번에도 회사 가까이에 방을 얻자고 생각했다. 가진 돈은 2000만원 정도였다. 미아리에서 혼자 살던 반지하의 전세금이다. 나는 불광역을 기점으로 연신내와 녹번동을 오가며 발품을 팔았다. 어떻게든 반지하를 벗어나고 싶었다. 수십 군데 부동산을 들락거렸지만 마침맞은 방을 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가는 누렇게 뜬 얼굴로 객사할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어느 쌀집에 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다세대 주택 2층, 전세 2000’이라고 괴발개발 적혀 있었다. 부동산을 겸하는 쌀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년의 아주머니가 맞아주었다. “방 구하려고?”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네, 밖에 전세 이천짜리 방이 있다고 해서.” 아주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학생이야?” 하고 물었다. “아뇨, 근처 직장에 다니는데요.” “결혼은?” “아직….” “그럼 혼자 살아?” “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럼 총각한테 딱이네” 하며 바로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다. 녹번역에서 10분 거리란다. 그 정도면 괜찮겠거니 싶었다. 한데 웬걸. 무슨 10분을 대한민국 국방부 시계로 재기라도 했단 말인가. 현역 시절의 이봉주 선수가 녹번역에서 구보로 가야 가까스로 10분이 걸릴까 말까 한 거리였다. 자기도 겸연쩍었는지 아주머니는 가는 내내 사귀는 사람은 있냐는 둥,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은 다 잘돼서 나갔다는 둥 객쩍은 소리를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산자락 초입에 위치한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이었다. 신축은 아니지만 깨끗했다. 모두 여섯 세대가 살고 있는 듯 보였는데 베란다를 통해 이웃집과 왕래하기가 쉬운 구조였다. 방은 널찍하고 볕도 잘 들었다. 이렇게 좋은 집을 단돈 2000만원에 구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서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장판이며 벽지도 이상 없었다. 물도 잘 나왔다. 지금껏 수다스러웠던 아주머니가 이 집에 들어서자 말수가 줄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집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지하철역에서 멀고 산자락 초입에 있어서 시세보다 싸게 나온 모양이라 여겼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당장 계약하자는 내 말을 들은 아주머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 같은 게 얼핏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사는 금방 끝났다. 큰 짐이라곤 책상과 침대가 전부였다. 정리하는 김에 쓸데없는 물건은 버리고 다시 보지 않을 책들은 ‘아름다운 가게’에 전부 보냈다. 이사한 뒤에는 항상 인사를 잘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하도 잔소리를 하시면서 떡까지 보내주셨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주말 오후에 이웃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옆집인 203호였다. 그런데 아무리 인터폰을 눌러도 기척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201호에서는 긴 머리의 자매님이 나왔다. 내 또래로 보여서 반가웠다. 잘 부탁한다며 떡을 건네니까 반응이 데면데면했는데 원래 말수가 없는 타입인가 보다 여기고 바로 돌아왔다. 101호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형제님이 살고 있었다.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201호와 마찬가지로 혼자 사는 듯 보였다. 그날은 101호와 201호 외에 다른 집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주말이 지난, 비 내리는 월요일이었다. 입사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회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쯤이었다. 여전히 102호와 103호, 203호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주말에 인사한다고 문을 두드려도 사람이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디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라 여겼는데. 평일 밤에도 불이 꺼져 있다니. 벌써 자는 건가. 나는 잠시 먼발치에서 102호와 103호, 203호의 창문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현관의 등이나 화장실 불이 비칠 수도 있으니까. 한참을 서성거렸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다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거겠지.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날따라 어째서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다세대 주택 전체의 어느 집에서도 작은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는 게 이유였을까. 내가 전에 살던 집은 달랑 세 가구뿐이었는데도 툭하면 소음에 시달렸다. 밤마다 텔레비전을 하도 크게 틀어놔서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었다. 하필 새벽에 청소기나 세탁기를 시끄럽게 돌리는 집도 있어서 참다 못해 싸우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깜빡깜빡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어딘가에서 들리는 묘한 소리에 눈을 떴다. 빠직, 빠직, 콩, 캉. 위쪽이었다. 내 방 위쪽이라면 지붕이다. 뭘까. 그런데 이상해서 자세히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면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잠들락말락하면 들렸다. 빠직, 빠직, 콩, 캉.

이후로 그 일은 금방 잊었다. 나도 인수인계를 마친 출판사 업무로 바빠졌기 때문이다. 필자들과의 술자리며 시위 현장에 대한 취재로 귀가가 늦어졌고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보름가량을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다가 입사하고 모처럼 정시 퇴근을 한 날의 일이다. 초저녁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나는 라면을 끓여 먹고 빈둥거리다가 일찍 침대에 누웠다. 피곤해서 금방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몸은 피곤한데 눈이 감기지 않았다. 이럴 때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는 듯했다. 이사 오고 처음 듣는 빗소리여서 그런지 신경이 쓰였다. 맥주나 한잔 마실까. 지금 마시면 살찔 텐데. 참자. 뭐 한잔 정도야 괜찮겠지. 이럴까 저럴까 갈등하는데 그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빠직, 빠직, 콩, 캉.

싼 전셋집 얻어
기쁜 맘으로 이사

이웃들에게 똑똑 인사
결국 만나지 못해

깊은 밤, 지붕에서 소리 들려
빈 옆집에서도 같은 소리가

이대로는 궁금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눈으로 확인해 보는 거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살금살금 다세대 주택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집 안에서 막연히 짐작한 것보다 비가 훨씬 세차게 쏟아졌다. 가파른 언덕을 조금 올라 지붕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데다 빗줄기로 인해 시야는 흐릿했다. 오밤중에 이게 무슨 짓인지. 그러면서도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비로소 내가 사는 202호 바로 위 지붕에 묘한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무슨 깃발 같은 게 흩날리는 줄 알았다. 누가 빨래를 널어놓았거나.

그런데 깃발 같기도 하고 빨래 같기도 한 그것이 어느 순간 스윽, 하고 일어났다. 여전히 어둠과 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뭔가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린애인가 싶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보니 성인 여자인 듯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형체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섭지 않았다. 그저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는 기분만이 강하게 들었다. 대체 저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움직이는 형태로만 보면 막 개업한 스마트폰 대리점 앞에 설치된 풍선인형과 비슷했다. 풍선인형이라, 그랬다. 그것은, 춤을 추고 있었다. 풍선인형처럼.

문득 더 이상 바라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뒷머리가 쭈뼛 섰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풍선인형 같은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라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럭 겁이 나서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혹시라도 뒤에서 쫓아올까봐 옆집처럼 불이란 불은 전부 껐다. 다행히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 후로는 집에 있는 동안에는 항상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해야 할 일은 점차 늘었고 나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소리가 다시 들린 건 장마가 막 시작된 첫날이었다. 그것은 비가 내리는 날에만 출몰한다는 특징이 있는 듯했다. 다만 이번에는 장소가 달랐다. 지붕이 아니라 옆집이었다. 틀림없이 201호였다. 나는 벽에 귀를 바싹 붙여보았다. 소리도 달랐다. 싹, 싸아아, 싹, 싸아아. 쇠로 만든 빗자루를 가지고 마룻바닥을 쓰는 것 같았다. 나는 201호 여자에게 주의를 줄 요량으로 가볍게 벽을 두드렸다. 한데 예의 바른 이쪽의 노크에 대한 응답은, 저 너머에서 쾅 하고 벽을 세차게 망치 비슷한 걸로 후려치는 소리였다. 지붕에서 나는 소리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지만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확신이 들자 화가 났다. 어디서 뺨을 맞고 어디서 화풀이를 하는 모양새였다고 할까.

나는 201호 앞으로 가서 인터폰을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무심코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소리를 내며 간단히 열렸다. 응? 뭐야. 내친김에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문 너머는 어두웠다. “저기요.” 불러도 기척이 없었다. “계세요?” 몇 번이나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켰다. 희미하게나마 내부가 가늠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현관에 신발 한 켤레가 없었다. 뿐만 아니다. 가구나 세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었다. 그때 오른쪽 방 안에서 예의 소리가 들려왔다. 싹, 싸아아, 싹, 싸아아. 나는 신발을 신은 채로 가만히 마루에 올라 방문을 살짝 열었다. 방은 깜깜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싹, 싸아아, 싹, 싸아아. 문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바로 내 앞까지 왔다고 생각했을 때 스마트폰의 불빛에 그것의 모습이 비쳤다. 그것은, 여자였다. 비 내리던 지붕 위에서 풍선인형처럼 펄럭거리며 춤을 추던 여자.

아마도 나는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뭔가에 걸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거기까지가, 내 기억의 끝이다.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간호사에 따르면 누군가 날 데려왔지만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고 한다. 하긴 알고 싶지도 않았다. 퇴원 후 나는 중곡동에 사는 동생 집으로 들어갔다. 부동산에는 적당히 사정을 둘러댔고 이사는 포장이사 업체에 맡겼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여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듣자 하니 ‘미쓰다 신조’의 소설 <괴담의 집>에 내가 겪은 일과 흡사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고 한다.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알고 싶다는 형제자매님들은 읽어보셔도 좋겠다.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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