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숍에서 일하는 이들을 ‘바버’라고 통칭한다. 이 직업은 얼마 전까지 쇠락해가는 직업군 중의 하나였다. 미용사가 헤어디자이너라 불리며 전문직 반열에 올라선 것과 대비된다. 남성들 사이에서 이용사 자격증이 아닌 미용사 자격증 취득이 더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하지만 바버들은 말한다. ‘바버(이발사)와 미용사는 엄연하게 구분되는 다른 직업이며 전문성으로 따지자면 헤어디자이너에 버금간다’고. 바버가 ‘깔끔’에 기반한 용모단정의 예술을 추구한다면 미용사는 ‘아름다움’에 기반한 미적 예술을 추구한다. 고도의 집중력과 정교한 가위질은 바버의 기본 자질이다. <한겨레>가 요즘 ‘핫’한 3명의 바버를 만났다.
“긴머리도 멋있게 다듬어요”
곽한별 바버 ‘트루핏앤힐’
트루핏앤힐은 윈스턴 처칠, 찰스 디킨스, 오스카 와일드가 찾았던 바버숍이다. 1805년 영국 런던에서 문을 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버숍’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갔다. ‘로열 워런트(인증)’를 보유해 영국 왕실에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트루핏앤힐이 지난 1월 서울 청담동에 한국 1호점을 열었다.
바버숍 트루핏앤힐에서 마틴이라는 이름으로 일하는 바버 곽한별(26)씨가 있다. 그는 2년 전까지 강남의 살롱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일했다. 여자, 남자 고객 모두를 상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외국 바버링 영상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그때 당시만 해도 너무 신기했다. 미용과 다르고 고객과 소통하면서 재밌게 일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얼마 후 그는 바버가 되기로 결심했다.
트루핏앤힐 등 바버숍 대부분은 예약제로 1시간 동안 한 손님만 상대한다. 맨투맨 작업으로 바뀌면서 그는 고객을 대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예전엔 매출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15~20분 안에 바쁘게 커트하는 게 아니라, 한 손님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고 작업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미용고등학교 출신이지만 사실 그의 커트 실력이 크게 는 건 군대에서다. 해군 이발병으로 입대한 그는 후반기 교육에서 이용 자격증이 있는 외부 교관에게 한 달여 동안 이발과 면도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23개월 동안 함정에 탄 수병 200여명의 머리를 책임졌다. 작전을 위해 몇 개월씩 바다에 머물 수도 있는 군함에는 이발소가 있다.
해군은 육군, 공군에 비해 윗머리가 길다. 바다에 빠졌을 때 잡고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바버숍에서 유행하는 ‘리젠트 헤어’(윗머리를 세워 넘기는 스타일)와 비슷하다. 그래서 해군엔 포마드를 바른 후 빗질해서 넘기는 장교, 부사관도 있다. 그가 이런 스타일에 자신 있는 이유다.
한국에선 아직 시작 단계지만 바버숍이 자신을 가꾸고 멋을 내는 남자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는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바버숍이 클래식한 스타일만 하는 곳이라는 인식은 깨뜨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버숍 하면 무조건 포마드를 바른 머리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남자의 모든 머리를 하는 곳이 바버숍이다. 꼭 짧은 머리만이 아니라 긴 머리도 얼마든지 깔끔하고 멋있게 다듬을 수 있다.”
그가 고객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딱 하나다. 예약시간을 지켜달라는 것. 한 고객이 예약시간에서 10분을 늦으면 그 이후 모든 고객의 시간도 그만큼 미뤄진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예약문화가 자리 잡지는 않은 것 같다. 예약만 하고 오지 않는 ‘노쇼’(no show)도 자주 발생한다.” 바버숍의 인기를 몰고 온 영화 <킹스맨>의 대사를 기억하자.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
김병철 객원기자
최가을 바버 ‘헤아’. 사진 윤동길 실장(STUDIO ADAPTER)
“남성의 벽, 깨고 싶었어요”
최가을 바버 ‘헤아’
“이 자리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라요.” 5일 서울 한남동 ‘헤아’(HERR)에서 만난 최가을(26) 바버는 만나자마자 이 말부터 꺼냈다. 눈가가 촉촉하다. 어느덧 3년차, 국내 1호 여성 바버인 그가 왜? “여성 바버에 대한 시선이 여전히 따가워요. 예전보다 나아졌지만요.”
이런 인터뷰도 처음이라고 했다. 그가 바버로서 첫발을 뗀 건 2014년 봄이다. 미용고교 졸업 뒤 3년차 미용사로 일하다 ‘헤아’로 이직하면서부터다. “솔직히 바버가 뭔지 몰랐어요.” 그럼에도 남성만을 위한 고도의 ‘컷’ 기술에 매료됐다. 바버에게 펌이나 염색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가위와 칼로 승부한다. 남성 바버들의 빼어난 손놀림, ‘나도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용기를 냈다. 한국, 아니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바버’가 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금기를 깨고 싶었어요. 사명감마저 생겼죠.” ‘남자’ 미용사나 간호사도 편견을 깬 첫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에선 여성 바버가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흔하다. 지금은 한국에도 10여명쯤 된다. “여성 바버를 희망하는 이들뿐 아니라 실제로 여성 바버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어 뿌듯하다”며 “바버로의 전업을 반대했던 남자친구도 이제는 ‘멋있다’고 격려해준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바버의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여자가 남자 머리를 어떻게 아느냐?”고 무시하는 고객을 만나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제 앞에서 ‘여자 바버라 싫다’, ‘남자 바버로 바꿔달라’는 고객도 있었는걸요.” 몰래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기도 여러 차례. 주위에 고민을 함께할 ‘여성’이 없었기에 외로움이 더 컸다.
고통의 시간은 약이 되어 돌아왔다. 요즘은 슬퍼서 우는 날보다 기뻐서 웃는 날이 더 많다. 그를 견디게 한 건 여성 바버라는 ‘자부심’이다. 남성 바버 못지않은 실력, 여성이기에 가능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섬세함. 지금은 그를 찾는 단골손님이 꽤 된다. 주말엔 예약손님이 꽉 차 식사도 거르고, 심지어 화장실도 맘껏 못 갈 때가 부지기수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요? 첫 방문 뒤 그 자리에서 저를 지목해 전담 바버로 삼고 멤버십 등록을 하는 고객들을 만날 때죠. 정말 날아갈 것 같아요. 제 실력이 맘에 들었다는 뜻이니까요.”
여성 바버 ‘최가을’은 항상 멜빵바지, 워커, 뉴스보이캡 등 ‘아메카지(아메리카 캐주얼)룩’을 즐겨 입는다. 바버가 되고 나서 하이힐과 치마를 벗어던졌다. ‘아메카지’는 그의 자부심과 개성을 담은 상징인 셈이다. “앞으로도 뚜벅이처럼 느리지만 묵묵히 바버라는 제 길을 찾아갈 거예요. 부모님도 제가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해요. 이 행복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인사 제대로 못해 죄송해요! 하하. 이해하시죠?” 20여분 전부터 한 고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김대복 바버 ‘밤므 바버숍’. 사진 윤동길 실장(STUDIO ADAPTER)
“손님 스타일, 내가 만들어”
김대복 바버 ‘밤므 바버숍’
바버 김대복(24)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인 전남 목포의 한 조선소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용접을 주로 했다. 손재주가 좋아서 금세 익숙해졌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꿈은 따로 있었다.
“원래 꾸미는 거에 관심이 많았다. 미용을 하고 싶은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다.” 그는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끝내고 밤에는 미용학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4개월 동안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미용사 자격을 땄다. 자격증은 운전면허와 비슷했다. 손님의 머리를 만지기 위해선 치열한 연습이 필요했다. 불 꺼진 미용학원에서 고단함을 뒤로하고 부단히 연습, 또 연습했다.
조선소를 다닌 지 1년이 좀 지난 뒤 회사를 관두기로 했다.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남자가 나이 들어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부모의 역정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김씨는 그렇게 미용실에 취업하게 됐다.
머지않아 새로운 갈증이 몰려왔다. 여성 손님과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제가 생각하는 예쁜 것과 여성 손님이 생각하는 예쁜 것이 차이가 있었어요. 남자 손님의 경우는 제가 권하는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고 스타일 상담이 훨씬 잘됐어요.”
그는 남성만을 위한 ‘바버’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용실을 다니면서 이용사 자격증 취득을 다시 준비했다. 1년 정도 미용실을 다니면서 이용사 학원을 병행했다. 펌을 중시하는 미용사 자격증과 달리 면도칼, 가위 등 날카로운 도구의 사용 솜씨를 주로 보는 이용사 자격증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위와 칼은 손에 붙었다. ‘가위손’이 따로 없었다.
지금 일하는 ‘밤므 바버숍’은 지난해 봄께 취업했다. 우연히 제주도 여행 중이었는데 당시 남성 커트 이벤트를 진행 중이던 숍 관계자를 만나 취업이 됐다. 취업이 결정되자 바로 짐을 싸 밤므 바버숍 매장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조선소, 미용사, 그리고 바버. 세번째 선택한 직업을 갖게 된 느낌은 어떨까. “대만족이다. 손님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 게 재미가 있어서 나 스스로 ‘좀 더’를 외치며 작업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힘든 점도 있다. 서비스업이다보니 근무 형태가 불규칙적이고, 남들 쉴 때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직업을 좋아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김씨는 말했다.
“후배를 양성하는 교육자가 되는 게 꿈이다”라며 다짐을 말하던 그는 기자를 예리한 눈으로 잠시 보더니 “앞머리를 좀 자르고 윗머리를 기르는 게 스타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해줬다.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그를 찾을 것 같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바버숍(BARBER SHOP)
이발소의 현대적 개념. 과거와 달리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세련된 서비스가 특징. 커트, 파마, 염색은 물론 면도 서비스까지 남성 헤어스타일에 특화된 곳. 향수, 화장품, 옷, 신발 등을 갖추고 남성 토털 스타일숍을 지향하는 곳도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