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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배우자···혹시, ‘엠오엠’?

등록 2017-07-13 11:08수정 2017-07-20 09:30

[ESC] 너 어디까지 해봤어?
성적 정체성이 다른 이들끼리 결혼
보수적인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
동성결혼 법제화·복지제도 확대 필요
게티이미지뱅크의 이미지를 활용해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재구성 했다.
게티이미지뱅크의 이미지를 활용해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재구성 했다.

100여년 전, 남자의 청혼을 수락하며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건 여자가 있었다. “부부가 될지언정 성관계는 바라지 마세요.” 여자를 13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왔던 그 남자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지적 자극을 주고받는 동료이자 ‘호가스 출판사’를 운영하는 동업자로, 무엇보다 사이좋은 부부로 30년을 함께 살았다. 아내의 정신착란과 신경쇠약이 재발할 때마다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펴준 이는 그 남자였고, 아내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써낸 실험적인 글들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 것도 그 남자였으며, 평생토록 그 여자가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 역시 그 남자뿐이었다. 그들은 영국 출신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다.

도대체 왜 레너드는 그토록 쉽게 섹스를 포기해버렸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섹스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을까? 아니면 레너드야말로 성적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자’였단 말인가? 정확한 사연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울프의 연대기로 보아 그들의 결혼이 ‘엠오엠’(MOM. Mixed-orientation marriage)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엠오엠이 뭐냐고? 이 듣도 보도 못한 말은 어디서 튀어나왔냐고?’

엠오엠은 ‘성적 지향 또는 성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뜻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무성애자와 유성애자 간의 결혼, 양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결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결혼, 동성애자와 양성애자 간의 결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버지니아-레너드 부부가 엠오엠 커플이었던 이유는 그 당시 버지니아에게 레너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던 여자, 비타 색빌웨스트(영국의 시인 겸 소설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무성애자 ‘젠가’(닉네임·34)씨를 만났다. 그는 3년째 엠오엠을 유지하는 중이다. 오랜 친구였던 게이 남편과는 애초부터 합의한 결혼이었고, 결혼해서 불편한 점이라고는 이따금씩 몰려오는 죄책감이 전부였다. “음, 가족과 친구들을 속인 점은 미안하지만… 장점이 그래도 더 많아요. 일단 부모님뿐만 아니라 회사 상사 같은 ‘결혼 오지라퍼’들로부터 벗어났고, 밤에 창문을 열어놔도 불안하지가 않은데다, 남편이 또 어지간히 자상하거든요. 그 친구는 고향이 보수적인 경북이다 보니 죽을 때까지 ‘벽장 게이(클로짓 게이)로’ 살 거래요.”

정확히는 ‘바이로맨틱 에이섹슈얼’(Bi-romantic asexual. 동성이든 이성이든 낭만적으로는 끌리지만 성적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는 사람)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젠가씨는 동성과 이성을 두루두루 만나봤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좋아도 ‘섹시하다’는 생각만큼은 해본 적이 없었다. “파트너와 야한 영화를 봐도, 섹스를 해도 지루하다는 생각뿐이었고, 머릿속에는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이나 맛집 목록만 떠다녔어요. 동성이든 이성이든 섹스트러블이 심했는데, 지금은 그냥 평화 그 자체죠.(웃음) 사생활이요? 당연히 ‘노터치’입니다.”

젠가씨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켜더니 “결혼이 낭만적인 사랑에 기초한다는 생각부터가 ‘신화’”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성애자들도 그렇지 않나요? 처음엔 뭐 에로스로 시작했다 치더라도 결국 경제공동체나 양육공동체로 변질돼버리잖아요. 그렇다고 사랑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좋은 기억을 공유한 파트너라면 아끼고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언제까지고 있을 테니…. 말하자면 우정 같은 사랑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남편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고, 다른 부부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말하는 ‘정상적인 결혼’과 그 시작이 달랐을 뿐….”

물론 젠가씨처럼 ‘해피한’ 엠오엠만 있는 건 아니다. 정체성을 숨긴 채 결혼하는 사람도,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도 모두 엠오엠에 속하니 말이다.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 디킨대학교에서 실시된 연구보고서는 “실험 대상이 된 남성 중 절반은 결혼 전에 자신이 게이(일지 모른다고)라고 생각했으며, 85%는 결혼하고 나서야 자신이 게이임을 분명히 깨달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쌍방 간 합의되지 않은) 엠오엠은 배우자의 성적 지향이 드러나는 즉시 3분의 1 이상이 혼인관계가 끝나고, 나머지 3분의 1도 짧은 기간이나마 노력하지만 결국엔 파국”이란다. “배우자의 성적 지향을 뒤늦게 알게 된 이성애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에 자괴감·배신감을 느끼거나 주변인들의 시선 때문에 상담조차 꺼릴 수 있어 사회적인 지지가 필요하다”는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 역시 눈여겨보기에 충분하다.

‘엘지비티에이아이큐’(LGBTAIQ. 성소수자를 종합해 부르는 약어) 커뮤니티 내에서도 엠오엠은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누군가의 ‘혼외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찜찜함’ 때문이다. 신림동에 사는 레즈비언 한아무개(24)씨는 이렇게 말했다. “포장해봤자 ‘기혼 이반’이라는 거잖아요? 제 가치관으로는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레즈비언이나 게이이면 동성 애인과 동거를 하거나 비혼 선언을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아님 ‘돌싱’ 딱지라도 붙이고 대시하시든지. 언젠가 데이트앱에서 아이까지 있는 30대 여자가 당당하게 만나자고 하던데, 저를 불륜 상대로 보는 것 같아 너무너무 불쾌했어요.”

반면 “50대 기혼 레즈비언과 사귀는 언니를 알고 있다”는 희정(35)씨는 한씨와는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결혼은 당연히 해야 된다는 인식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시절이었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업을 가지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이었잖아요? 지금도 현실은 녹록지 않아요. 지금도 이런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싶어요. 사랑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택이니 불륜이든 뭐든 자기들끼리 좋다고 한다면 응원해주고 싶어요.”

비단 레즈비언 세계에만 엠오엠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게이 세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곤 했었다. 이른바 ‘유부(남) 게이’라고 불렸다. 그들도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소수자들이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온전히 놓아버리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이반결혼사이트 ‘드림데이팅’ 권오현 대표는 “게이와 레즈비언이 결혼하는 케이스가 실제로도 많은데,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집에서 자꾸 결혼 압력이 들어오니까 서로 ‘남친’, ‘여친’이라 하고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라며 “포털사이트가 동성애, 이반 등의 단어를 아직도 금칙어로 지정하고 있는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혹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성소수자들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상당히 힘들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은 “우선 (합의되지 않은 엠오엠의) 1차적 책임은 누군가를 속인 개개인에게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모든 사람이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인 연애·결혼만능주의에 속박된 나머지 결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라고 분석했다. 김 소장은 “동성결혼 법제화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하고, 궁극적으로 동성결혼, 동거 등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살 수 있는 문화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데 지금의 복지제도는 지나치게 가족 중심적”이라며 “비혼주의자나 부모나 배우자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의료나 교육, 대출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족의 테두리 혹은 이른바 ‘정상가족’에 속한 국민만 보호하면 안 되고,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완전한 개인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그래야 연애와 결혼을 강요하는 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hani.co.kr

* LGBTAIQ: 성소수자를 종합해 이르는 말.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자신의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Questioner), 남녀 한 몸(Intersex), 무성애자(Asexual)의 앞글자를 따 만들어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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