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와인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다.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르스 북부 나우사에 위치한 키르야니 와이너리 포도밭. 사진 윤동길 제공.
‘와인 마니아’인 나의 친구 포도에게.
안녕, 잘 지냈지? 오랜만에 네게 긴 편지를 쓰는구나. 지난달 31일부터 8일까지 ‘엔터프라이즈 그리스’(그리스 무역투자진흥공사)의 초청을 받아 그리스 북부의 유명 와인 산지인 나우사, 아민데오, 드라마 지역 등을 둘러보고 시음할 기회를 갖게 됐어. 한국에 오자마자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 밥은 굶어도 와인은 끼니마다 마시는 너 말이야.
알고 있니? 고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는 그에 못지않게 유구한 와인의 역사를 자랑해. 지금은 프랑스·이탈리아 와인이 전세계 와인 시장을 쥐락펴락하지만, 그 역사가 4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거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이 실은 와인의 신이었어. 그리스 신화엔 제우스 아들인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때려눕힐 때 흘린 피에서 그리스 토착 품종인 ‘아요르이티코’가 탄생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지. 그래서 ‘아요르이티코’를 흔히 ‘헤라클레스의 피’로 부르기도 해.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 유물로 와인을 보관했던 점토 항아리가 발굴되기도 했고. 2500년 전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잔도 나왔어. 대단하지? 하지만 인생사 아이러니지.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들. 사진 윤동길 제공.
이러한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와인은 지금껏 ‘뒷방 늙은이’ 신세였어. 2015년 기준 전체 생산량이 270만 헥토리터(hl)로 이탈리아(488만 헥토리터), 프랑스(422만 헥토리터), 스페인(378만 헥토리터)에 비하면 적으니까. 더군다나 대부분 내수로 소비되고 생산량의 3%만 수출되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그리스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매우 적었지. 한국에서도 그리스 와인은 ‘듣보잡’일 수밖에 없었어. 심지어 전문가 뺨치는 너도 잘 몰랐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몇년 전부터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대. 그리스에서 만난 그리고리스 미하일로스 그리스 와인 홍보대사가 내게 말했어. “지난해 세계 시장으로의 그리스 와인 수출량이 3만255톤에 이르는 등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요. 2008년 그리스 와이너리가 400여곳에 불과했다면 현재는 900여개에 이를 정도로 늘었지요. 앞으로도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최근엔 프랑스·이탈리아 등 와인 선진국에서 와인산업을 배우고 온 젊은 생산자들이 품종 개발, 숙성 방법 및 기간의 다양화, 자동화 시스템 등을 통해 차별화된 와인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어. 일부 전문가들은 그리스가 와인 강국으로 도약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망하기도 해. 여기에는 그리스 와인만의 독특한 맛이 큰 역할을 했어.
그리스 북부 드라마 지역에 위치한 코스타 라자리디 와이너리 와인 숙성실. 사진 윤동길 제공.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샤르도네 같은 국제적인 품종에 식상해진 와인 애호가들이 아요르이티코, 아시르티코, 크시노마브로, 말라구시아 등 그리스 토착 품종 와인에 주목하기 시작한 거지. 맛이 완전히 다른 신세계거든.
‘뛰어난 가성비’도 전세계가 그리스 와인에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야. 프랑스·이탈리아 와인에 비해 천가지의 다양한 향과 맛을 지녔거든. ‘마리아주’(와인과 음식 맛의 조화)가 최고라고 극찬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아.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씨도 “같은 가격대 프랑스 와인과 비교하면 그 우수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개성적이면서도 깔끔한 맛”이라며 극찬하더군.
3년 전부터는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고 있어. 그리스 와인은 한식과 매우 잘 어울리는 것이 강점이야. 그리스의 로제 및 스파클링 와인 역시 최고 수준이지.
분홍색이 선명한 그리스 로제 와인. 사진 윤동길 제공.
크시노마브로와 아요르이티코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은 맛보니 삼겹살(쌈밥)이나 불고기 등과 잘 어울릴 듯하더라. 아시르티코와 말라구시아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회나 해산물, 채소샐러드 등과 함께 먹으면 뒷맛이 깔끔할 거야. 은은한 분홍색만으로 입맛을 자극하는 로제 와인은 시원하게 식혀 더운 여름철 치킨, 피자, 튀김 등과 함께 먹으면 ‘치맥’ 못지않은 궁극의 맛을 선사할걸. 스파클링과 로제는 육류, 어류 모두 어울리는 전천후 와인이고.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은 쿠키, 케이크 등과 어울리니 디저트용으로 제격이지.
처음에는 ‘그리스 와인 별거 있겠어?’ 하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어. 서울의 세련된 와인바에서 네가 추천해서 마신 프랑스, 이탈리아 와인의 여운이 그리스행 비행기 안에서도 진하게 남아 있었거든. 하지만 언빌리버블! 기대 이상이었어. 무엇보다 모스코필레로 품종의 스파클링 와인은 딱 내 스타일이었어. 내 혀에 짜릿한 자극을 안겨줬어.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 기분이라고 할까. 조만간 함께 와인 한잔해. 야마스(건배)!
나우사·아민데오·드라마(그리스)/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