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헤어롤 2개가 ‘여성의 고된 노동 현실’을 일깨우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탄핵 선고 당일과 11일 마지막 촛불집회에서는 헤어롤을 착용한 시민들이 눈에 띄었고, 에스엔에스에서도 이를 패러디한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정미 재판관의 탄핵 선고 당일인 3월10일 출근길 모습. 연합뉴스
헤어롤, 일명 ‘구루프’의 위상이 이렇게 높았던 적이 있는가. 곱슬 또는 동그랗게 말린 모양을 뜻하는 영단어 ‘컬’(curl)과 동그란 고리를 뜻하는 ‘루프’(loop)를 합쳐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 구루프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영어 ‘그룹’(group)의 일본어 발음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어중간한 길이의 뻗친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해주고, 힘없이 처진 머리의 뿌리 쪽 볼륨을 살려주고, 마치 펌을 한 듯 풍성한 웨이브도 만들어주는 게 헤어롤이다. 다재다능한데다 몇백원 하지도 않는 착한 가격까지 헤어롤을 칭찬할 이유는 널렸다. 하지만 그걸 머리에 말고 있으면 ‘억척스런 아줌마’나 ‘촌스러운 여자’ 같아 “나, 헤어롤 쓰는 여자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무혈 시민혁명’으로까지 평가되는 2016년 겨울~2017년 봄 역사에서 화룡점정을 찍은 지난 10일 아침.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정으로 상식을 확인해준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은 헤어롤에겐 ‘시민권’을 선사했다. 머리 뒤쪽에 만 헤어롤 두 개가 ‘탄핵소추안 인용’, ‘8명 찬성’을 암시하는 메시지였다는 해석은 애교다.
그날 밤과 다음날,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헤어롤 두 개를 머리에 단 여성들이 넘쳐났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도 개그우먼 김미화씨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헤어롤을 말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 올리브영에선 10~12일 헤어롤 매출이 평소의 36%나 뛰어올랐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동안 일은 일대로 하면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던 헤어롤이 ‘제자리’를 찾은 것은 물론 ‘잇 아이템’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사실 헤어롤은 청소년들에게 오래된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금 30~40대라면 중고등학교 때 최소한 반에서 한두 명이라도 쉬는 시간이나 자습시간에 분홍색 헤어롤을 말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야간 자습시간,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멋은 대학교 가서 내도 충분해. 이건 압수!” 그날 나는 “내 구루프, 내 구루프” 하며 밤새 울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구입했다.
며칠 전엔 지하철에서 앞머리에 분홍색 헤어롤을 매단 여학생과 마주쳤다. 실수로 안 뺐다고 확신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저기, 구루프…?” 하며 머뭇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옆에 있던 그녀의 친구들이 거들었다. “일부러 구루프 착용하고 셀카도 찍어요.” 도대체 왜? 서울 광장동에 사는 신서연(가명·16)양은 이렇게 말했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말고 외출하려는데 아빠가 ‘그 기괴한 걸 왜 안 빼고 그냥 나가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 질문이 이상해요. 우리도 생각할 줄 알거든요. 요즘 우리 또래는 앞머리에 멋 내는 게 열풍인데 고데기를 책가방에 항상 넣고 다닐 수도 없고 헤어롤로 쉽게 모양도 내고 세련돼 보이니까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두고 봐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친구 김영서(가명·16)양은 “아침 일찍 학교 가고, 밤늦게까지 학원 다니느라 솔직히 머리 말릴 시간도 없어요. 어른들은 ‘창피하지 않냐’고 자꾸 묻는데, 그게 왜 창피해요. 학생인 우리도 나름 열심히 사느라 길을 걸어가며 헤어롤로 머리 모양 잡는 건데요”라고 했다. 뺏는다고 안 하나. 야단친다고 안 하나. 어른들 눈엔 ‘이유 없는 반항’이지만, 청소년들 보기엔 ‘이유 없는 금지’만 남발하는 어른들을 골리고 자신들의 의사를 드러내는 게 바로 헤어롤인 셈이다.
지난 11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등장한 헤어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러고 보니 에스엔에스엔 2~3년 전부터 여자 연예인들이 올린 ‘헤어롤 셀카’도 차고 넘친다. 이엑스아이디(EXID) 하니, 투애니원 산다라박, 시크릿 전효성, 애프터스쿨 리지 등 걸그룹 멤버뿐 아니라 김소현, 이민영 등 인기 탤런트 등 일일이 이름을 적기도 힘들 정도다. 마치 민낯을 드러낼 때처럼 ‘이렇게 망가져도 나는 예뻐요’라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쁨’을 강요받는 여자 연예인들이 일부러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의도와 무관하게 그 예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트는 효과도 발휘한다. 비록 소극적이나마, 여성의 외모를 향한 가혹한 잣대에 대응하는 조롱 또는 저항의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다시 이정미 전 재판관의 헤어롤로 돌아가면, 그건 동질감이다. ‘헌법재판관’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위직 여성도 우리와 똑같이 저렴한 헤어롤로 머리를 매만지고 제 손으로 몸을 단정히 하는, 스스로를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다. 머리카락에 정성스럽게 헤어롤을 말고, 고데기와 꼬리빗 등을 활용해 볼륨감을 준 뒤 꼬고 말아 틀어올려 수십 개의 실핀으로 고정하는 누군가의 올림머리와는 전혀 다르다. ‘이 전 재판관의 헤어스타일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올림머리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나오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전 재판관을 통해 헤어롤이 시민권을 얻은 데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직장인이자 아이를 키우는 우리 시대의 워킹맘이라는 동병상련의 정서도 담겨 있다. 올해 초 보건복지부 여성 사무관의 사망이 상징하듯, 워킹맘의 삶은 고되다. 작은 실수도 워킹맘에겐 “왜 집안일 때문에 직장에 집중하지 못하냐”거나 “왜 회사일 때문에 아이들을 내팽개치느냐”는 비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전 재판관의 헤어롤을 조롱하는 사람은 없었다.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던 실수가 여성의 노동과 관련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찌 됐건 나는 이 일련의 ‘헤어롤 현상’에서 희망을 본다. 작고 보잘것없는 ‘구루프’가 일하는 여성과 엄마들을 위로하고 대변해줬다.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그러니 우리, 민주주의를 지키겠단 다짐이 필요한 날엔 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외출하는 게 어떨까? 아, 당신도 민주주의자로군요,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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