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관스님이 커피를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박미향 기자
바리스타를 포함한 커피 전문가 8명이 앉자마자 스님이 차 한잔을 돌리면서 퀴즈를 냈다. “이 차에는 3가지가 들어간다. 맞혀보시길.” 음료의 미세한 맛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에게는 도발적인 질문이다. 옅은 갈색 차를 마시는 소리만이 도량에 울려 퍼졌다.
지난 13일, 경기 이천 감은사 ‘마하연사찰음식문화원’에 아기 솜털보다 부드럽고 하얀 설탕보다 반짝거리는 눈발이 날렸다. 떨어지는 꼴이 현실 같지 않아 극락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차를 내온 이는 감은사 주지 우관(53) 스님. 그는 지난해 사찰음식 전문서인 <보리일미>를 펴내는 등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찰음식 대가다. 1988년 스물넷에 출가해 서른넷에 인도 델리대 석·박사 과정을 밟은 그는 2009년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사찰음식 대향연’을 계기로 사찰음식 세계에 입문했다. 그 뒤로 프랑스 천재 요리사 파스칼 바르보를 비롯해 외국의 유명 요리사들도 스님을 찾아와 ‘요리 비법’을 물었다. 그런 스님을 요즘은 커피 전문가들이 앞다퉈 찾는다. 스님의 커피 추출법이 매우 신비하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날 감은사를 찾은 김요한(36) ‘홈 바리스타 클럽’ 운영자는 “전국에서 스님처럼 커피를 추출하는 이는 거의 없다. 맛이 이상할 것 같은데 마셔보면 신비의 명약처럼 근사하다”고 했다. 그는 동료 바리스타들을 모아 5년 전부터 감은사에서 ‘커피 봉사’를 하고 있다. 매년 5월 감은사 사찰음식 행사에선 이들이 내린 향긋한 커피가 무료로 제공된다.
외국 요리사도 찾는 사찰음식 대가
“깨어있게 하는 느낌 좋아” 커피에 빠져
핸드드립은 물론 직접 로스팅까지
“커피도 인간사도 정해진 건 없어”
보이차 등 차를 주로 마시던 스님은 5년 전 어느 날 독특한 경험을 했다. “우연히 커피를 한잔 마셨는데 마치 보이차를 마신 것처럼 몸이 따스해지고 기가 순환되기 시작했다.” 커피의 이로움도 발견했다. “신경을 예민하게 깨어 있게 한다. 그런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커피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요리사이기도 한 스님이 인스턴트커피를 사 마실 수는 없었다. 커피의 재료인 원두도 식재료나 마찬가지이니 직접 ‘조리’에 나섰다. 원두를 사 냄비, 프라이팬, 뚝배기 등에 볶아봤다. 하지만 도무지 향과 맛이 온전히 나질 않았다. 실력자를 찾아 나선 스님이 만난 이가 바로 김요한씨. 이후 감은사에는 에티오피아 원두와 국내에서 개발한 로스팅기, 그라인더, 하리오 드리퍼 등이 갖춰졌다.
우관스님의 커피는 원두가루의 양은 많은데 맛이 매우 연해 커피 전문가들도 놀란다. 박미향 기자
스님은 커피 추출기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로라하는 커피 전문가인 김씨와 김준연 ‘알렉스 더 커피’ 총괄팀장, 주성현 ‘180커피 로스터스’ 수석 로스터, 임한억 ‘바리스타컴퍼니’ 대표, 이상현 ‘플라츠 로스팅 컴퍼니’ 대표 등이 기대에 찬 눈으로 스님을 쳐다봤다. 스님은 80~85℃ 뜨거운 물을 드립필터가 깔린 하리오 드리퍼에 조금 부었다. “드립필터에 물을 먼저 붓는 이유는 아무리 질 좋은 필터라도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이어 스님이 드리퍼에 원두가루를 가득 채운 뒤 다시 물을 조금 부어 불렸다. 김씨는 “원두가루의 표면을 열어주는, 뜸을 들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보통 다른 바리스타들은 한번 원두를 적시고 난 다음 기다렸다가 물을 가득 한번만 부어 추출한다. 그런데 스님은 적은 양의 물을 3~4번 더 부어 뜸을 또 들였다. 스님처럼 하면 커피 추출에 다른 방식의 5~6배인 10분 이상이 걸린다.
“원두가루를 드리퍼에 가득 채워넣는 것도 스님의 다른 점”이라고 김씨가 말했다. 보통은 원두가루를 드리퍼의 3분의 1 정도만 넣는 게 일반적이다. 스님은 “반드시 정해진 용법이나 용량은 없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쪼르륵쪼르륵 드리퍼를 타고 커피가 만들어졌다. 맛을 본 이들은 눈과 혀를 믿을 수 없다며 신기한 맛이라고 평했다. 일반적으로 커피는 원두가루를 많이 넣으면 진하다. 하지만 스님의 커피는 묽은 차처럼 매우 연했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워 마치 둥글둥글한 지구를 통째로 한입에 머금는 것 같았다. “물의 온도와 간 원두의 굵기에 맞는 커피 추출 시간을 직관적으로 안다”는 스님에게 커피는 그가 조리하는 사찰음식과 다를 바가 없는 ‘음식’이었다.
스님은 불자들과 종종 커피를 매개로 긴 대화를 한다. 200~300㎖ 정도 우린 커피에 계속 뜨거운 물을 첨가해 마시면서 5~6시간 정도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상현 대표는 “이곳에 오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된다. 스님과 대화를 하면서 고민했던 문제들이 풀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우관 스님이 말을 받았다. “스스로 눈을 떠야 한다. 내가 눈을 뜨지 못해 인지를 못하면 누가 나를 끌고 가 바다에 빠뜨려도 모른다. 지혜가 없어서다.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스님은 젊은 커피 바리스타들과의 교류를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라며 “뒷산이 진달래로 붉게 물드는 봄이 오면 또 오시라”라고 했다. 퀴즈 정답도 알려줬다. “야생 둥굴레 뿌리, 콜라비, 표고버섯.” 배웅하며 당부말도 얹었다. “만족할 줄 아는 풍요로운 삶,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사시라.”
이천/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입이 호강하는 우관스님 사찰밥상
우관 스님은 13일 커피 공양 전에, 차가운 겨울에 먹는 사찰음식으로 밥상으로 차렸다. 엄나물유부초밥, 콩단백구이, 토마토·오이·매실장아찌묶음, 파래연근전, 견과류무침, 표고버섯무조림 등 8가지 음식이 풍성하게 나왔다.
봄에 채취해 말린 엄나물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꺼내 불린 뒤 스님이 담근 집간장과 들기름만으로 무쳐 낸다. 밥과 만나 봄을 앞당기는 듯했다. 콩과 뿌리채소 7~8가지를 삶아 글루텐을 섞어 만든 콩단백은 불을 만나 독특한 풍미를 자랑했다. 보관도 쉬워 자칫 영양이 부족할 수 있는 겨울철 스님들에게 유용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냉동해뒀다가 먹을 때 적당한 크기로 잘라 포도씨유로 구운 뒤 고추장, 집간장, 조청, 고춧가루, 생강 등을 섞은 양념에 버무리면 완성이다. 채식주의자들에게 일찍이 소문이 나 판매를 조르는 이도 많다.
(왼쪽부터)콩단백구이, 표고버섯무조림, 아삭한 김치, 파래연근전. 박미향 기자
스님은 “표고버섯무조림을 가장 많이 먹는다. 생배추콩가루된장국도 즐긴다”고 말했다. 2014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국제슬로푸드대회 ‘2014 살로네 델 구스토’에서 김치 강연을 했을 정도로 스님의 김치는 유명하다. 이날도 아삭아삭 씹히는 김치는 발효과정을 거쳤는데도 오히려 채소처럼 신선해 입이 호강을 했다. 이 김치를 묵혀 만든 묵은지볶음은 된장과 들기름을 써 향토적인 구수한 맛이었다.
스님 맛의 비결은 집간장에 있다.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집간장은 코를 휘어잡을 만큼 독특한 풍미가 나는데 구하기 어려운 삼의 한 종류가 들어가기 때문이란다.
이천/박미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