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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내서 미안” 편지에 ‘김치찌개 답장’이 왔다

등록 2016-09-29 08:31수정 2016-09-29 11:27

[esc] 커버스토리
김미영 기자가 딸 셋 ‘육아 동지’ 남편에게 쓴 손편지 이야기
남편과 두 딸에게 쓴 ‘손편지’. 평소 말과 카카오톡 대화로 나눌 수 없었던 가슴속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후 달라진 남편과 아이들의 태도 외에 평소 아내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한 건 더 큰 수확이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남편과 두 딸에게 쓴 ‘손편지’. 평소 말과 카카오톡 대화로 나눌 수 없었던 가슴속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후 달라진 남편과 아이들의 태도 외에 평소 아내와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한 건 더 큰 수확이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손편지’ 취재를 하면서 남편과의 13년 전 연애 시절이 떠올랐다. 7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꽤 자주 편지를 썼다. 편지지에 ‘당신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구구절절한 장문의 연서를 쓰기도 했고, 짬짬이 수첩과 메모지를 찢어 “사랑해!” 쪽지편지를 띄우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손편지를 즐겨 쓰던, 아니 잘 쓰던 소녀였다. 고교 때는 짝사랑하는 선생님께, 대학 때는 군대간 남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수없이 날렸었다. 답장이 없을 땐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답장을 받았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게 바로 ‘손편지’의 힘 아닐까.

둘다 일하며 아이들 키우다보니
전쟁영화처럼 흘러간 12년…
서운함·미안함·고마움 담은 글에
“나도 노력할게” 변화의 기운이

문득 남편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남편과 소원하던 참이었다. 둘 다 일을 하면서 세 살 터울의 세 딸을 키우다 보니 퇴근 뒤 아이들을 누가 찾을 거냐, 설거지·청소·빨래는 누가 할 거냐 같은 문제로 자주 언쟁을 벌였다. 사소한 일 같지만 싸움이 잦아지니 서운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가끔은 카카오톡으로 퍼부어대기도 했는데, 그건 서로의 가슴에 비수만 꽂는 꼴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손편지, 정말 ‘약’이 될까?

지난 19일, 퇴근길에 편지지를 사러 동네 문구점에 들렀다. 다양한 색깔의 민무늬 원색, 꽃과 잎사귀가 그려진 우아한 것, 깜찍한 멘트와 캐릭터가 수놓인 귀여운 것 등 종류가 많았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렸지만 쉽게 고를 수가 없었다. ‘편지지 하나 고를 때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구나.’ 나는 남편의 취향조차 파악하지 못한 ‘불량 아내’였던 거다. 고심 끝에 초록색 잎사귀가 그려진 것, 낙엽이 수놓인 것 2개를 골라 들었다.

편지를 쓰겠다 결심은 했지만, 막상 진짜 쓰려니 손발이 오글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안 쓴 탓이다. 그 덕에 편지지는 가방 안에서 이틀을 보냈다. 겨우 볼펜을 들었지만 호칭부터 백지 상태. ‘사랑하는 당신’, ‘사랑하는 ○○씨’…. 아~ 아무래도 이건 아니올시다. ‘○○ 아빠!’? 이것도 어색하다. 벌써 편지지 몇 장을 찢어버린 것이냐. 따르릉~. 때마침 남편한테 전화가 왔다. “갑자기 1박2일 경주 출장을 가게 됐어.” 오호라~. 오늘은 우리 팀 회식이 있는 날, 알코올을 섭취할 게 뻔하니 술기운을 빌릴 수 있고 남편 눈치도 안 봐도 되니, 퇴근 뒤 제대로 쓸 수 있겠구나!

21일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았다. ‘맨정신’이 아닌데도 호칭은 결국 생략. “오늘 아침에 화를 내서 미안해”로 첫 문장을 시작했다. “바로 사과할 생각이었지만, 쉽지 않더라. 당신 출근 시간이 일렀던 지난 1년간 고생한 것 뻔히 아는데. 난장판 된 집,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 세탁기에 널지 않은 채 방치된 빨래를 보니 그 마음이 쏘~옥 들어가 버렸어. …”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나니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려 나왔다. “당신 없이 네 명의 여자가 하룻밤을 보내려니, 더욱더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알겠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 …”

남편과 두 딸에게 쓴 ‘손편지’. 평소 말과 카카오톡 대화로 나눌 수 없었던 가슴속 이야기들을 담았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남편과 두 딸에게 쓴 ‘손편지’. 평소 말과 카카오톡 대화로 나눌 수 없었던 가슴속 이야기들을 담았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평소 잔소리를 달고 살던 내 자신에 대한 반성,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감정, 나아가 우리 가정의 화목과 행복을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할 점들을 빼곡히 적다 보니 2장이 훌쩍 채워졌다. (손 엄청 아팠다, 글씨는 날림체). 연애·신혼 때 좋았던 추억들, 한 편의 전쟁영화와도 같았던 12년 결혼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손편지의 장점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쓰는 동안 전적으로 상대방을 생각하고, 또 나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 다음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식탁 위에 남편에게 쓴 편지를 올려놓았다.

기왕 시작한 거, 딸들한테도? 한글을 아직 못 읽는 막내를 빼고, 12살 첫째와 9살 둘째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수아에게’. ‘사랑하는 아란에게’. 오올~, 딸들한텐 첫 문장부터 ‘술술’이다. 맏딸 수아에겐 “힘들고 지칠 텐데 묵묵히 첫째 역할을 잘해줘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늘 지금처럼 밝은 모습 잊지 말아 달라”고 썼다. 둘째 아란에겐 “언니를 존중할 것, 동생에겐 너그러울 것, 친구들에겐 친절할 것”을 당부했다. 물론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들 덕분에 행복하다. 서로 웃으며 살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이 편지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긴장됐지만, 현관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덧. 그런데,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잘 읽었다”는 말도, 답장도 없다. 하지만 촉이 왔다. 편지를 읽은 게 분명하다. 남편과 딸들의 말투와 행동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지난 23일 아침, 남편은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남편은 직접 지은 아침밥과 손수 끓인 김치찌개로 아이들의 아침상을 챙겨주고 있었다. “미영아, 이리 와 밥 먹어!” 이 말도 잊지 않았다. 그뿐이던가. 그날 밤에도 남편은 늦게 귀가한 나를 대신해 아이들 저녁밥을 먹이고, 설거지까지 했다. 집 청소도 말끔하게 되어 있었다. 언빌리버블!

주말인 다음날 저녁,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편지 읽었는데, 왜 아무 얘기가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실천해야겠구나 해서 노력 중이지. 결혼 생활도 되돌아보고…. 노력할게.” “음. 좋아, 좋아. 수아란, 엄마한테 답장 안 써?” “쓸게, 쓴다구.” 두 딸 녀석들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자기 방을 향해 뛰어갔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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