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편지가 거의 유일한 ‘원거리 소통수단’으로, 일상적으로 쓰였다. 절절한 개인사부터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논쟁까지, 조선시대에 쓰여 지금까지 이어져온 유명한 편지 네 편을 소개한다.
원이 엄마 편지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고성 이씨 이응태(1556~1586)의 무덤에서 나왔다. 어린 아들, 부모형제를 두고 서른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남편을 향한 원망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아내의 편지다.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먼저 가십니까….” 가로 58㎝, 세로 34㎝의 한지에 붓으로 빼곡히 써내려간 한글 편지엔 뱃속 태아를 생각하며 느끼는 서러움, 남편을 꿈속에서 만나고 싶다는 간청까지 황망하고 안타까운 심경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무용극 등으로 제작될 정도로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사단칠정’ 논쟁은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의 대표적인 사례다. 여러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가운데, 영남의 안동에 살던 스승 퇴계 이황과 호남의 광주에 살던 제자 기대승은 8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박을 거듭했다. 그 결과 퇴계는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주리론을 완성했고, 이기일원론을 편 기대승은 율곡 이이가 주기론을 집대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의 편지에선 장기간 심오하게 파고든 철학적 토론과 끈질긴 학문의 열정, 제자의 학식을 존중하며 대등하게 대한 이황의 인품도 엿볼 수 있다.
정조 어찰첩
정조가 1796~1800년 4년간 좌의정 등 고위직을 역임한 심환지에게 보낸 300통에 달하는 비밀편지 모음집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의 핵심인물에게 보낸 비밀편지라는 점에서 정조의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사고가 드러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유자삼동예명’
다산은 6남3녀의 자녀 가운데 6명을 병마로 잃었다. 그는 ‘요절한 자녀의 태어난 흔적을 써놓아 뒷날 증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선배 이기양의 충고에 따라, 일찍 숨진 자식들을 향한 애끊는 마음을 글로 남겼다. 그중 ‘유자삼동예명’은 그가 귀양에서 돌아온 뒤 아내가 임신하고 건강한 아들까지 태어난 세 가지 기쁨을 안긴 귀한 아들이라며 ‘삼동’(三童)이라 이름 지은 아들이 3살 때 천연두로 숨졌을 때 쓴 추모시다. 편지 형식의 이 글 곳곳에서 자신의 얼굴을 쏙 빼닮아 더욱 귀여워했던 아들을 향한 절절한 부성애가 느껴진다. “네 모습이 숯처럼 검게 타/ 사랑스러운 얼굴 다시 볼 수 없구나/(중략)/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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