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악기의 주인 지병옥(왼쪽)씨와 그의 며느리 민경선씨.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낙원상가 부활의 노래
익선동 한옥마을에서 고향 동네 슈퍼 같은 ‘거북이슈퍼’ 운영하는 시골 청년 박지호씨
익선동 한옥마을에서 고향 동네 슈퍼 같은 ‘거북이슈퍼’ 운영하는 시골 청년 박지호씨
한국은 일본이나 유럽 국가에 비해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경우가 드물다. 일본 여행을 하다 대물림으로 100년이 넘은 소바(일본식 메밀국수) 가게를 만나면 감탄사부터 나온다.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 등으로 단절돼 명가가 될 기회를 놓친 집들이 많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지금이라도 바꿔보고자 나선 이들이 있다. 이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외친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 낙원상가. 전국에서 가장 큰 악기총판장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신광악기’를 운영하는 지병옥(76)씨가 있다. 지씨는 국내 최초이자 최고인 플루트 수리 전문가다. 그가 플루트를 처음 접한 때는 1950년대다. 미8군에서 흘러나온 플루트를 보자마자 매료됐다.
1956년 종로의 한 악기판매점 종업원으로 이 세계에 입문했다는 그는 1969년에야 자신의 가게를 열 수 있었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그는 월급을 한푼도 받지 못했지만 끼니는 해결해줬던 악기가게가 좋기만 했다. “한국전쟁 직후였잖아요. 다들 배고픈 시절이었죠. 월급은 바라지도 않았어요.” 인자한 미소가 인터뷰 장소인 신광악기에 퍼졌다. 1974년 종로 악기판매상들이 낙원상가로 하나둘 이주를 시작하자 그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70~80년대 낙원상가는 악사들의 천국이었다. 즉석에서 오디션이 열렸고 뽑힌 악사들은 미8군이나 지방의 클럽, 카바레, 나이트클럽 등의 무대에 올랐다. 300~500여명의 악사들이 몰려드는 악사 인력시장에서 주인공은 트럼펫과 색소폰이었다.
유행에 편승할 만도 한데 그는 “대중문화에 위기가 오고 클래식 붐이 올 것”으로 보고 플루트 수입과 수리 기술 연마에만 정진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리공이 1000명이 넘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플루트 수리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멀리 제주도에서도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을 얻은 그는 나이 들수록 독학으로 쌓은 플루트 수리 기술이 사장될까 걱정이 늘었다. 주변 지인들은 대가 끊기는 것을 아예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예민한 플루트의 선율이 그저 좋아 백발이 성성해질 때까지 그 소리를 지키며 살아온 그의 바람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보상으로 그저 후계자가 나타났으면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한생을 바친 일이 이어지길 바라지요. 사실 산다는 것은 별게 아닙니다.” 그는 돈이나 부귀영화 따위에는 관심 없다. 세속적인 욕망에 매달렸다면 300개 넘는 악기판매상점 중 최고 어른인 신광악기가 대형 악기판매업체가 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도 신광악기는 10평도 채 안 될 정도로 작다.
지난해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내 며느리가 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지씨의 둘째 며느리 민경선(44)씨가 이 세계에 뛰어들었다. “아버님의 기술이 사장되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요. 아날로그적인 면이 마음을 끌어당겼죠.” 주일한국대사관에서 10년간 근무하다 몇년 전 귀국한 그는 “일본에서 가업을 잇는 집안을 많이 봤습니다. 아버님께 제대로 배우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하며 겸손하게 웃는다. 골방 같은 좁은 신광악기에서 이들은 섬세한 손놀림으로 하루 2~3개의 플루트를 수리한다. 지씨는 “9년만 더 하고 문을 닫으려 했는데 며느리가 먼저 가업을 잇겠다고 해서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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