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과 성욕은 비례할까? 최소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만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여인들과 연인 관계였던 그는 왕성한 식욕의 소유자였으며 미식을 즐겨 종종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의 조국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는 식욕만 따져보면 피카소의 후예들이 넘쳐난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점심은 4시가 훌쩍 넘어야 끝나고, 새벽 2~3시까지 이어지곤 하는 저녁만찬은 점심이 끝나고 불과 3~4시간 뒤에 펼쳐진다. 식욕이 성욕을 뛰어넘는 나라일지 모른다. 맛집도 넘쳐난다. 화려하고 세련된 타파스바가 있는가 하면 수백년간 한자리를 지킨 노포도 있다. 스페인 정부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해 스페인을 찾은 한국 관광객 수는 35만명으로 2014년에 비해 2배라고 한다. 맛집 목록은 식도락가의 나라, 스페인 여행의 필수품이다.
타파스바 ‘살라 데 데스피에세’의 판체타에 싼 달걀요리. 사진 박미향 기자
살라 데 데스피에세의 요리사가 타파스를 만들고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살라 데 데스피에세(Sala de Despiece)
마드리드에서 가장 ‘핫한’ 타파스바. 타파스는 술과 함께 즐기는 스페인 음식으로 21세기 들어 수천가지가 될 정도로 그 맛과 형태가 발전했다. 본래 타파스는 와인 잔에 파리나 벌레가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접시를 올려놓으면서 생긴 음식이다. 접시에 간단히 올린 안주가 타파스가 된 것이다. 이 바는 관광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지인들의 맛집이다. 식당 콘셉트가 매우 독특하다. 15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을 정육점처럼 꾸몄다. 벽에는 고기를 담았을 법한 스티로폼이 붙어 있고, 천장에는 정육점의 커다란 갈고리가 걸려 있다. 정육점 주인이 입는 빳빳한 비닐 앞치마를 두른 5명의 요리사가 토치(휴대용 화염 분출기)로 관자 등을 굽는데, 마치 영화 <더 셰프>를 보는 듯하다. 다양한 30가지 타파스의 맛도 매력이다. 타파스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가 쓰는 기교를 맘껏 펼친 타파스들이다. 웨이터가 직접 맛의 마지막 단계를 완성한다. 수비드(저온조리법)로 살짝 익힌 달걀노른자가 올라간 얇은 판체타(삼겹살로 만든 햄)에 웨이터가 토치를 갖다댄다. 판체타가 녹아 돌돌 말리자 달걀노른자를 반으로 잘라 싸서 먹으라고 웨이터가 내민다. 보는 내내 침이 고인다. 최소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하는 맛집이다.(Calle de Ponzano, 11, 28010 Madrid/+34 917 52 61 06/개당 3.5~24유로)
산미겔시장엔 신선한 해산물이 많다. 사진 박미향 기자
산미겔시장(Mercado de San Miguel)
마요르광장 동쪽에 있는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먹자골목이 형성돼 있다. 절인 대구, 다양한 하몬, 오만가지 향을 피우는 타파스, 신선한 굴, 빵과 디저트 등이 백화점 푸드코트처럼 가득하다. 주머니 가벼운 여행객들에게 천국이다.(Plaza de San Miguel, s/n, 28005 Madrid/+34 915 42 49 36)
레스타우란테 사차(Restaurante Sacha)
1972년 문 연 사차는 스페인 가정식이 주 메뉴다. ‘바칼라오 콘 카르도’(대구요리), ‘리뇨네스 알 시불레트’(소 콩팥요리), ‘플루마 데 부에이 알 아호’(마늘을 곁들인 쇠고기요리) 등이 나온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미식 행사 ‘마드리드 퓨전’이 열릴 즈음이면 행사에 참여한 유명 셰프들이 찾아와 북적거린다. 노포답게 음식을 나르는 이조차 머리가 희끗하고, 벽이 고풍스럽다.(Calle de Juan Hurtado de Mendoza, 11, 28036 Madrid/+34 913 45 59 52/평균 1인당 60유로)
현지인들이 줄서서 먹는 타파스바
백화점 푸드코트 같은 산미겔시장
트렌드세터들의 사랑방 스트리초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 단골집도
스트리초(StreetXO)
마드리드 20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캐주얼한 레스토랑. 오픈 전 1~2시간 먼저 와 있는 건 기본. 손님들은 3시간 이상 줄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예약과 전화는 받지 않는다. 최근 스페인에서 떠오르는 샛별로 인정받고 있는 다비드 무뇨스 셰프의 두번째 레스토랑으로 악당들의 본거지 같은 식당의 인테리어가 흥미로운 곳이다. 아마추어의 아트 갤러리를 연상시킨다는 그의 첫번째 레스토랑 디베르쇼(DiverXO)는 이미 <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획득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요리를 ‘머리에 박힌 총알’, ‘잔혹함’, ‘티브이에서 방송하는 포르노 같은 충격’ 등으로 표현할 정도로 괴짜다. 힙합스타처럼 헐렁한 옷과 문신, 묘한 모양의 귀걸이 등을 한 채로 조리한다. 스트리초의 종업원들과 요리사들도 문신을 하거나 빨갛게 염색한 이들이 많다. 칵테일바는 우주선을 연상시킨다. 라운지바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곳은 마드리드 트렌드세터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하다. 음식은 일본, 한국, 중국, 타이 등 동양권의 맛과 서양식을 교묘하게 섞어 색다르다. 바나나 잎으로 감싸 구운 생선요리, 홍합과 돼지고기 위에 고수를 얹고 양상추로 싸 먹는 쌈요리 등. 서양인들에게는 생소해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동양인들에겐 자국 음식과 괴리가 커 부담스러울 수 있다.(Calle de Serrano, 52, 28001 Madrid/8~20유로)
라 볼라 타베르나(La Bola Taberna)
<론리 플래닛>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식당에 들어가면 살짝 열린 주방 문 사이로 불판에 올라간 작은 도자기가 여러 개 보이는데, 그 안에는 고기와 병아리콩으로 만든 스튜가 있다. 스페인 전통식이다. 질 좋은 스페인산 올리브오일을 뿌린 안초비는 대서양의 바다 향을 품고 있다. 스페인은 세계 최대 올리브 생산국이다. 올리브를 짠 기름인 올리브유도 하몬처럼 여러 등급이 있다.(Calle Bola, 5, 28013 Madrid/+34 915 47 69 30/5~25유로)
아사도르 도노스티아라(Asador Donostiarra)
스페인은 축구 강국이기도 하다. 영웅 대접을 받는 축구 선수들의 맛집은 어딜까? 아사도르 도노스티아라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 선수들의 단골집이다. 축구장 같은 넓은 실내는 금방이라도 함성이 들릴 것 같다. 벽에는 선수들의 유니폼과 방문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스페인식 순대도 있어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이곳의 단연 최고 메뉴로 달군 도자기판에 익혀 먹는 쇠고기를 꼽는 미식가들이 많다. 얇은 쇠고기에는 왕소금이 왕창 뿌려져 있다. 고기의 겉은 익은 상태이나 안은 붉다. 달군 도자기판은 온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붉은 속을 감칠맛 나게 익히기에는 충분하다. 과한 점심으로 배가 불러도 고기가 자꾸 입으로 들어간다.(Calle de la Infanta Mercedes, 79, 28020 Madrid/+34 915 79 08 71/6~66유로)
이밖에 <미슐랭 가이드> 별을 받은 레스토랑인 ‘루아 레스타우란테’(Lua Restaurante. Paseo de Eduardo Dato, 5, 28010 Madrid/+34 913 95 28 53)와 ‘엘 클루브 아야르드’(El Club Allard. Calle de Ferraz, 2, Bajo Derecha, 28008 Madrid/+34 915 59 09 39)도 가볼 만하다. 엘 클루브 아야르드는 샘표식품의 장을 써 한식 요소를 가미한 맛도 선보이고 있다. ‘라 카르멘시타’(La Carmencita. Calle Libertad, 16, 28004 Madrid/+34 915 31 09 11)도 스페인 정통 정찬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마드리드/박미향 기자
mh@hani.co.kr
스페인 슈퍼 가면 사야 할 두 가지
① 하몬은 돼지 뒷다리살을 염장 숙성시켜 만든 것이다. 백돼지로 만든 ‘세라노’와 이베리아 반도 토종 흑돼지로 만든 ‘이베리코’로 나뉘는데, 이베리코 하몬이 한 단계 위다. 이베리코 하몬은 사료 종류와 사육 방식에 따라 4등급으로 나뉜다. 사육장에서 백돼지용 사료를 먹여 키운 흑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데 세보’, 방목장에서 사료를 먹여 키운 흑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데 세보 데 캄포’, 방목장에서 사료와 도토리를 같이 먹여 키운 흑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데 레세보’, 울창한 숲에서 방목해 도토리만 먹여 키운 흑돼지로 만든 ‘이베리코 데 베요타’로,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더 좋은 하몬이다.
② 올리브유는 고급일수록 짙은 황금색과 녹색을 띠고 과일 향이 난다. 수확하고 처음 짠 기름 중 0.8% 미만의 산도를 지닌 올리브유를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라 한다. 최상급이다. 발연점이 낮아 튀김기름으로 적당하지 않고 빵을 찍어 먹거나 샐러드 소스로 적당하다. 2% 미만의 산도가 있는 올리브유를 ‘버진 올리브유’, 버진 올리브유와 정제오일을 혼합한 걸 ‘퓨어 올리브유’라고 한다. 뒤의 것보다 앞의 것이 좋다. 투명 병보다 까만색 병에 든 것이 좋고, 사과 향이 나는 올리브유가 고급이다.
박미향 기자
오는 10월 한겨레신문사는 ‘맛기자, 박미향과 함께 떠나는 새콤달콤 음식여행, 스페인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먹거리를 문화와 역사로 풀어보는 여행으로 <미슐랭 가이드> 별점 받은 레스토랑의 식탁부터 서민들의 길거리 음식까지 다양한 맛을 즐기는 여행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