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수요미식회> 장면 갈무리
[박미향 맛 기자]
누구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설사 피붙이가 아니더라도 서러운 일이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남아있고, 흔적 한 조각이라도 부여잡고 싶다면 그 미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금천교 기름떡볶이 할머니’는 내게 그런 분이다. 서울 종로구 금천교시장에서 40년 넘게 기름떡볶이를 팔아온 김정연 할머니의 별세 소식이 날벼락처럼 날아왔다. 김 할머니는 지난 3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
김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개성에서 잠시 서울로 내려왔다가 전쟁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평생을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재혼도 할 만한데 김 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도 귀에 울린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김 할머니는 통일을 기다렸다. 금천교시장 길을 도란도란 떠들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북에 두고 온 세 딸들이 더 그리웠다. 주변의 지인들은 할머니가 북에 두고 온 자녀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며 늘 탄식하셨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김 할머니는 유난히 학생들에게 후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아이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떡볶이를 주는가 하면 심지어 꼬깃꼬깃 접은 돈을 건네기도 했다.
내가 할머니를 처음 안 것은 대략 5~6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연히 금천교시장을 찾았다가 무쇠솥뚜껑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떡볶이를 볶아 파는 김 할머니를 발견하고 방앗간 참새처럼 끌렸다. 김 할머니의 맛은 허리도 펴지 않은 채 손녀에게 깨를 버무려 한과를 만들어줬던 나의 외할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20여 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금천교시장에 있었다. 김 할머니는 간장 등의 양념을 넣어 볶았는데, 쫄깃하면서도 단맛이 적어 자꾸 집어먹게 되는 마력을 발휘하곤 했다. 두툼한 쌀떡의 과도한 물컹함이 없는, 70년대 얇디얇은 밀가루떡볶이를 연상하게 하는 그 맛을 이제는 볼 수 없다. 식도락가들에게는 세상 한쪽을 잃어버린 것처럼 비극적인 슬픔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금천교시장 근처를 지날 때면 반드시 김 할머니를 만났다. 떡볶이가 떨어진 날이면 엉덩이 반쪽만 겨우 들이밀 수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김 할머니가 빠른 손놀림으로 만드는 떡볶이를 구경하곤 했다. 5000원이면 푸짐했다. 한번은 주문을 하고 뚱뚱한 까만 봉지를 받아들었는데 현금이 없어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김 할머니는 “그냥 가, 다음에 줘”라고 했다. “근처 은행에 다녀올 게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고집을 부렸다. “다음에 줘.”
김 할머니의 떡볶이를 기사화한 적은 없다. 마주 보고 두런두런 김 할머니의 역사를 묻곤 했는데 늘 “뭐 하러 물어?” 하며 나의 호기심을 타박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기자로서 책임과 의무는 방기했는지는 몰라도 단골로서 의리는 지켰다. 내가 쓴 기사로 인해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면 김 할머니는 원치 않은 인기로 손마디의 주름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대신 누군가 그 동네 ‘기름떡볶이’에 관한 ‘썰’을 풀어놓으면 “통인시장의 기름떡볶이보다 금천교시장 할머니 기름떡볶이가 더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5~6년 전 떡볶이 취재차 김 할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음식칼럼니스트 황교익씨도 추억이 많다. “모든 실향민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슬픔 같은 것을 그분에게서 봤다”면서 “평생 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워하시면서 시장 좌판에서 장사를 하신 그 분의 삶을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고 한다. 결국 취재를 포기하고 술 한 잔 하러 갔다는 그는 유난히 사진 촬영을 싫어했던 할머니를 추억하면서 “영혼이라도 고향에 가 자식들을 만나서 평안을 찾으시길 바란다”고 추모했다.
김 할머니의 가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와인바 ‘오그랑베르’를 운영하는 작가이자 음식칼럼니스트 박준우씨는 “무섭게, 순식간에 변하는 골목에서 수십 년간 한 자리를 지켜왔던 할머니를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면서 “할머니의 포근한 기운이 그리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인들의 추모도 이어진다. 트위터 등 에스엔에스(SNS)에선 추모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배고프지 않아도 가끔 인사 삼아 들러 떡볶이를 산 적도 있었다. 명복을 빕니다”(@moon_on_rivers), “왠지 한 시절이 간 느낌이다. 명복을 빕니다”(@baxacat) 등.
지금 가게 터에는 김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글이 붙어 있다. 단골 고객 한 명이 붙였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지난 7월14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김찬식 동장과 변호사 입회 아래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종로구 사회복지협의회는 김 할머니가 기부한 집 전세금 7000만원과 예금 일부로 김 할머니 이름의 장학 사업을 운영할 예정이다. 김 할머니는 장례를 마치고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추모공원에 묻혔다.
1917년에 태어나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텨내신 김 할머니. 그토록 원하던 가족과의 재회의 꿈을 끝내 못 이루고 떠나신 김 할머니. 하늘에서라도 평안하시길.
박미향기자mh@hani.co.kr, 사진 <수요미식회> 장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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