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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시대의 ‘득템 천국’ 중고시장

등록 2015-01-07 20:58수정 2015-01-08 09:57

서울대 안에 있는 마켓인유 매장에서 직원들이 중고물품 진열대에 올라간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다.
서울대 안에 있는 마켓인유 매장에서 직원들이 중고물품 진열대에 올라간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다.
[매거진 esc]
쓰던 물건 선입견 줄고 불황 맞물려 성장 ‘중고물품 유통’
최근엔 스마트폰·캠핑용품 각광
2014년의 마지막날 서울 공덕역 인근 마포벼룩시장 ‘늘장’은 한 해의 물건을 정리하려는 판매자들로 붐볐다. 중고 시장에서 성수기로 꼽는 ‘청소 시즌’이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사는 강아무개(25·여)씨는 이사를 앞두고 옷과 신발을 한아름 안고 늘장 안에 있는 중고 가게 ‘마켓인유’를 찾았다. 옷장 속에서 오래 잠자던 옷들을 밝은 빛 아래 펼쳐놓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값비싼 브랜드 옷이 아닌 것도 마음에 걸렸다. 옷을 받아든 늘장 직원들은 디자인과 옷 상태를 한벌 한벌 꼼꼼히 살피고 판매가를 정해 가격표를 붙였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옷값의 35%를 가져온 사람에게 준다. 베이지색 스카프를 햇볕에 비춰 보던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얼룩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가방에 넣으려는데 늘장을 찾은 다른 손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저, 괜찮으시면 그 스카프 제가 가져도 될까요?” 강씨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강씨는 이날 가져온 옷값으로 1만5000원을 받았다. “돈도 돈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옷을 꼼꼼히 보고 챙기니 내 옷의 가치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는 것이 강씨의 판매 소감이었다. 판매자도 구매자도 어쩐지 ‘득템’한 듯한 흐뭇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캠핑트렁크 매장에 쌓인 중고 캠핑용품들.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캠핑트렁크 매장에 쌓인 중고 캠핑용품들.
뒷줄에 서 있던 다른 손님들은 가져온 옷을 다른 물건으로 바꾸기도 했다. 중고 물품을 가져오면 현금으로 지급하는 마켓인유에서 2014년 매장 이용 통계를 보면, 판매자들 중 돈으로 받아 가는 사람은 40% 정도고 다른 물건으로 교환해 가는 사람이 30% 정도 된다. 새 주인을 만날 때까지 물건을 맡겨두는 위탁판매도 30% 가까이 됐다. 교환 땐 판매값의 50%를 쳐주기 때문에 값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지만,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고 했다.

생산과 소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B급 시장’으로 불리지만 중고 시장은 빠르게 커왔다. 지금 유통업계에서는 한 해 중고 시장의 유통 규모를 온라인 12조원, 오프라인 6조원 정도로 추산한다. 2013년 8월 공덕동에 실험매장을 열면서 시작한 사회적 기업 마켓인유는 그해 12월엔 서울대에도 매장을 열었다. 학기 중엔 하루 200명 정도가 이 매장을 찾는다고 했다. 매장 물건의 70%가 중고 제품이고, 나머지는 수공예 작가 작품이나 사회적 기업이 만든 물건들을 판다. 판매자에게 현금으로 보상함으로써 중고 물건 재순환을 자극하겠다는 이곳은 판매수수료는 미국의 중고 의류 전문점 방식을 따르고, 위탁판매는 일본 가게들의 선반대여업에서 실마리를 얻었다고 했다.

온·오프라인 중고 시장 규모
18조원에 육박
B급 시장 물건에서
‘롱 라이프 디자인’으로 가치 재평가

마켓인유 물건 보관소를 뒤져보니 여성 옷과 액세서리가 가장 많았지만 노트북, 녹즙기 같은 소형가전이나 그릇세트 같은 살림용품도 많았다. 주로 선물로 받거나 경품으로 받은 것들을 중고 가게에 내다판다. 동네 벼룩시장이라고 작게 볼 일이 아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코란도 자동차가 나와서 지난해 18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전문 자동차 판매자가 성능을 점검해준 것도 아니지만 차 주인이 직접 차의 내역을 설명하고 구매자는 차를 보고 사는 것이라서 덩치 큰 물건들도 빨리 거래가 이뤄진다고 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
중고 캠핑용품 판매점인 캠핑트렁크 은평지점 김민준 점장은 “중고로 사면 무조건 득템”이라고 주장한다. 중고 시장도 트렌드를 탄다. 몇년 전만 해도 노트북 컴퓨터와 자동차 중고 시장이 발달했다면 요즘엔 스마트폰, 캠핑용품 중고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이 가게 한켠엔 중고 텐트와 침낭, 캠핑용 의자들이 쌓여 있었다. 새것일 때 8만원이었던 침낭이 중고로 3만원, 12만원짜리 의자는 5만원에 팔리고 있었다. 김 점장은 “보통 캠핑은 아이 때문에 시작하고 아이 때문에 접는다고들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캠핑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로 구매자고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캠핑을 접는 사람들이 판매자가 된다”고 귀띔한다. 캠퍼들의 장비 욕심도 중고 시장을 키우는 데 한몫한다. 얼마 전엔 56가지 캠핑용품을 가져와서 250만원을 벌어간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이 가게에선 그렇게 사들인 캠핑용품에 5~20% 정도의 이윤을 붙여 다시 판다.

대량생산과 저가 물건이 소비를 주도하는 시대에 굳이 중고 용품을 사고파는 이유는 뭘까? 마켓인유 김성경 대표는 우선 “시장 전체적으론 너무 많은 제품이 잉여로 처리되는 시대를 지나 저성장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것의 순환을 극대화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며 “남이 쓰던 물건을 질색하던 사람들이라도 중고 시장에서 한번 좋은 경험을 하고 나면 달라진다. 이 물건이 새것일 때 누군가가 수많은 다양한 물건 중에 이걸 샀다는 것은 그 제품만의 돋보이는 점이 있어서 선택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어찌 보면 중고는 선택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물건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디자인 편집숍 디앤디파트먼트는 “중고는 힘이 세다”는 철학을 내세운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디앤디파트먼트 서울 매장은 새 물건과 중고품을 함께 판다. 오래된 우윳빛 접시들과 멜라닌 그릇, 맥주회사 상표가 찍힌 유리컵들은 문을 닫는 식당이나 중고 물품 판매점에 가서 사온 것이다. 이은선 점장은 “식당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강도도 세고 디자인도 대중적이라고 판단한다. 인쇄소에서 썼던 서류함도 파는데 대중적으로 선택받고 오래 살아남은 디자인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한 중고 그릇도 오래 지속될 가치가 있는 ‘롱 라이프 디자인’이라는 위치가 부여되면 시선이 달라진다. 이 가게에서 맥주잔은 한국 기념품을 찾는 외국인들이 구입하는 물품 일순위란다.

박미향 기자가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에서 구입한 중고 서류함과 도시락통.
박미향 기자가 디앤디파트먼트 서울점에서 구입한 중고 서류함과 도시락통.
서울 홍대 앞과 삼청동, 부산 서면에 재활용 디자인 물품을 파는 편집숍 오브젝트는 가게 한쪽에 물물교환 코너를 만들었다. 중고품을 가져가면 물건 상태와 선호도에 따라 빨간, 초록, 노란색 스티커를 받고 같은 색깔 스티커가 붙여진 물건으로 바꿔갈 수 있다. 홍대점을 찾는 손님은 하루 200명, 그중 20~30%가 물물교환 코너를 다녀간다.

1월2일 찾은 홍대점 물물교환 코너에선 빨간 스티커가 붙여진 독특한 모양의 선반부터 초록 스티커가 붙은 컴퓨터 키보드, 노란 스티커가 매겨진 책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스티커로 등급을 매겨두지만 동화 <잭과 콩나무>처럼 자기 물건이 어떤 물건과 교환될지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새 신발을 가져와서 색연필로 가져간 화가가 있고, 선물받은 만년필을 가져와서 모자로 바꿔간 남자도 있었다고 했다. 오브젝트 김나래 엠디는 “제값을 받자는 게 아니라 제품의 순환이 목적이다. 물물교환은 맛을 본 사람들이 계속 오기 때문에 처음엔 서툴러도 이만큼 가져오면 무엇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놓는 물건들이 갈수록 좋아진다”고 했다. 마켓인유 직원들도 “손님들이 사용한 물건을 다시 팔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물건을 소중히 쓰다가 다시 가지고 오는 등 지난 1년 동안 사람들의 소비패턴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고 했다. 판매자가 구매자가 되고, 구매자가 판매자가 되면서 중고 시장은 돌고 돈다.

글·사진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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