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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요리

등록 2014-11-26 20:27수정 2014-11-27 11:25

사진 박미향 기자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석유풍로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그을음이 올라왔다. 유량계에서 남은 석유량을 확인하고 심지를 조절해서 푸른빛이 도는지 체크했다. 노란 양은냄비에 물을 담아 올렸다. 끓기를 기다렸다. 볏가리를 밤새 서로 옮겨 쌓았다는 의좋은 형제의 그림이 그려진 라면 봉지를 뜯어서 끓는 물에 넣었다. 내 최초의 ‘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을 끓이고 면과 수프를 넣고 익기를 기다려서 젓가락을 대는 일. 이 단순한 과정으로 나는 요리에 입문했다. 불을 다루었고, 재료를 익히는 물을 보았다. 염도와 재료의 냄새, 그리고 힘찬 젓가락질. 라면은 우리에게 각별한 존재이지만, 처음으로 요리에 발을 들이는 출입구이기도 했다. 라면이 없었으면 우리는 언제 처음 요리를 해보게 되었을까! 밀가루 반죽을 해서 국물을 내고 수제비를 끓일 수 있었을까! 그건 좀 어렵다. 육수를 내어 잔치국수를 삶았을까! 국수 봉지에는 삶는 방법도 쓰여 있지 않으니 그것도 힘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여섯 줄로 된, 완벽한 레시피가 라면 봉지에 적혀 있었다. “기호에 따라 파와 계란, 김치를 곁들이면 더 맛이 좋습니다”라는, 거의 모든 라면에 적혀 있는 변하지 않는 추천사를 포함해서.

참고로 말하면, 라면회사의 개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맛있는 라면은 봉지에 적힌 대로! 내 라면은 확장되었다. 송이를 넣은 라면도 끓여보았고, 이즈음의 겨울에는 자체 레시피로 만드는 굴탕면도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굴을 열 개쯤 넣으면 수프의 양을 ⅓ 줄여야 한다. 그리고 양송이 두 개쯤 넣고 파의 하얀 부분을 총총 썰어 얹으면 훨씬 맛이 좋다. 볶음 라면도 내가 파스타보다 잘하는 요리다. 면 삶은 물을 ⅔쯤 따라내고 기름 두 큰술을 더해서 볶으면, 이것이야말로 요리로 둔갑한다. 마지막에 달걀 한 개를 풀어서 마치 중화요리풍으로 만드는 비결도 있다. 라면은 어쩌면, 내 요리 인생의 거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라면 끓이기에 성공하자 안심하고 외출을 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전화로 배달을 시킬 수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딸아이가 처음 아비에게 대접한 요리가 라면이었다. 녀석은 성격답게, 봉지 뒤에 적힌 조리법을 꼼꼼히 훑어보고 또 보았다. 컵으로 물의 양을 대중해서 넣고, 라면이 정말 ‘봉지에 적힌 대로 삶아지는지’ 들여다보던 광경이 기억난다. 내게 라면을 내밀면서 얼굴에 가득하던 흥분과 수줍음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야, 네가 만든 요리는 훌륭했단다. 이 아비처럼 라면으로 입문한 요리 인생을 축하한다. 우리는 라면을 도대체 몇 개나 끓여야 늙어 죽을 수 있을까. 다만, 그 라면이 끼니를 잇기 위한 최후의 방편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가난한 문사가 방문한 친구에게 내민 수프도 없는 반 개의 라면이 아니기를 빌 뿐이다. 날이 쌀쌀하다. 누구도 굶지 않는 날이기를, 라면이라도 끓여 나눠 먹을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기를.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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