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가 물을 만나서 반죽이 되고 국수가 된다. 그다음은? 말려야 한다. 말려야 저장하기 좋고 멀리 가져갈 수도 있다. 국수는 물과 밀가루가 있으면 어디서든 만들 수 있지만 건조는 아무 데서나 할 수 없다. ‘볕’이 좋아야 한다. 중동과 지중해에서 국수 문화가 태동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바람과 태양이 좋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른 국수를 낙타에 싣고 대상은 무역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건조 스파게티가 지중해에 인접한 남부에서 시작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1800년대 나폴리 사진을 보면, 국숫발이 치렁치렁 늘어진 국수건조공장이 등장한다. 이 도시는 겨울을 빼곤 비가 잘 오지 않는다. 길거리가 그대로 국수 건조장이 된다. 그렇게 말린 국수에 마늘과 토마토를 넣고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나폴리처럼 건조한 곳은 아니지만 한국도 도처에 국수공장이 있었다. 필자가 자라던 서울 변두리도 서너 개의 공장이 경쟁하며 국수를 뽑았다. 비가 오면, 공장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말리다 만 국수를 가게 안으로 들이느라 북새통을 이루던 장면이 있었다. 아이들은 지나가다가 주인 몰래 국수를 톡톡 끊어 먹었다. 덜 말라 비릿하면서도 짭짤했다. 맛있었다기보다 심심풀이였다. 주인에게 걸리면 치도곤이었다. 주인은 “먹더라도 한 곳에서 잘라 먹지 이곳저곳 자르냐”고 호통을 쳤다. 길이 2m가 넘는 갓 뽑은 국수가 나무로 만든 건조대에 걸리는데, 여기저기서 잘라 먹으면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먹더라도 한 군데서 잘라 먹으면 피해가 덜하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심부름시키면 이 공장에 가서 시멘트 포대로 포장한 국수를 샀다. 신김치 넣어 ‘제물국수’로 끓여 먹을 때는 넓적한 우동국수, 비빔이나 잔치국수용은 가는 국수를 샀다. 그때 가는 국수가 요즘 중면 정도 굵기다. 당시 기술로는 요즘 나오는 가랑비처럼 가느다란 국수는 뽑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포항 구룡포에 가니,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온 느낌이다. 1971년도에 문을 연 오래된 국수공장이 아직도 영업하고 있다. 국수 명장 ‘할매’가 계신다. 제일국수공장의 이순화(76)씨다. 맛있는 국수 만드는 비법은 단순하다. “초리~하고 매끄리~하게 만들어야 맛있제.” 이게 끝이다. 탱탱하고 예쁘고 매끈하게 빚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재래식 기계에서 뽑은 국수를 바닷바람 부는 건조장에 내다 말린다. 건조장이라고 해봐야 자그마한 마당이 전부다. 그래서 국수를 사려고 해도 한 달 넘게 기다리기가 일쑤다. 건조는 국수의 품질에 큰 영향을 끼친다. 소금과 물 말고는 아무것도 넣지 않는 이 집 국수가 맛있는 이유다. 밀가루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산품이고. “겨울에 국수가 더 맛있니더. 하늬바람(북동풍) 불 때 국수가 최고니더.” 바람이 국수를 만든다는 말씀이다. 이 집 국수는 삶아 놓으면 탱탱하고 쫄깃하다. 입안에서 입체적으로 착착 감긴다. 씹는 맛이 ‘살아 있’다고밖에 표현이 안 된다. 희한한 맛이다. 이방인들의 질문에 대꾸하면서 할매는 발이 안 보이게 바쁘다. “국수 하는 사람은 발이 안 보여야 하니더. 엄청 바쁜 일이라 놀면서는 모합니더.”
다 마른 국수를 자르는 이씨의 손길도 신기하다. 기계를 쓰지 않고 손대중으로 툭툭 잘라도 아주 정확한 길이가 된다. 평생이다시피 해온 일이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 원래 구룡포에는 제일국수공장이 생길 무렵 일곱 개의 국수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 문을 닫고 이 집 하나만 남았다. 효율이 우선시되는 대형 국수공장의 공세에 밀려 자연건조하는 국수공장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시절이 변해 맥이 끊길 뻔했던 자연건조 국수가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국수 맛이 좋으니 사가려는 사람이 많아 그럭저럭 품값은 빠진다고 한다. 한 박스 주문한 국수가 다 떨어졌다. 다시 구룡포에 가야겠다.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