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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남자는 누가 다 데려갔을까

등록 2014-08-20 19:26수정 2014-08-21 13:41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의 발행인 겸 편집장, 천준아씨.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의 발행인 겸 편집장, 천준아씨.
[매거진 esc] 라이프
가부장적인 ‘노처녀’ 선입견 유쾌하게 걷어차는 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과 천준아 편집장
잡지를 펼치자 알록달록한 세계지도가 펼쳐진다. 국가마다 색이 다르다. 색마다 숫자가 붙어 있다. 분명 뭔가를 구분하는 기준일 게다. 지디피(GDP·국내총생산)? 소득불평등 측정 수치? 숫자부터 보자. 16.10~17.93, 13.48~14.87, 9.66~11.66 등. 도대체 무엇일까?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페니스 세계여행, 대물(大物)을 찾아서’. 도발적이다. 짐작하겠지만 숫자는 나라별 남성 성기의 평균 크기다. 글을 쓴 ‘미스박’은 한 웹사이트가 공개했던 이 내용을 글의 주제로 삼았다. ‘20대 초반, 남자친구 집에서 미국 포르노를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독신 여성들의 다양한 성경험을 발랄한 문체로 소개하고 ‘생애 가장 황홀하고 만족스러웠던 섹스의 공통점은 페니스의 크기가 분명 아니다’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선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야하다기보다는 웃음을 자아내는 이 기사는 지난 5월에 창간한 인디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에 실렸다. 2012년에 창간준비호 <줄라이 컴 쉬 윌>(July come she will)이 나온 바 있다.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천준아(38)씨는 서문에 창간준비호를 제작할 당시 자신은 ‘연애도 잘되지 않는 노처녀’였다고 한다.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의 1인출판 강좌를 듣다가 불쑥 “주변에 노처녀들이 범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왜 연애가 안되지”란 의문을 품었다. ‘오래 숙성된 와인은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왜 나이 든 그녀들은 하나같이 유별나고 눈이 높고 도도하고 히스테릭한 노처녀로 정의되고 마는 걸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노처녀가 만드는 노처녀를 위한 노처녀 얘기’를 전하기로 결심했다.

독신여성 향한 사회적 편견에
시원한 돌직구와 솔직한 속내
결혼·연애 좌절에 대한
진지한 심리적 분석도

굳이 ‘노처녀’가 아니더라도 이 잡지의 깨알 같은 재미는 누구나 반할 정도다. 좌담기사를 보자. ‘노처녀들의 소개팅’ 좌담에 나선 이들. 얼굴이 모두 여배우다. 여배우만큼 예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과 가장 닮은 여배우 사진을 자신의 아바타로 내세웠다. ‘엠마 왓슨(84년생) 회사원’, ‘피비 케이츠(79년생) 자영업’이란 타이틀(주장?)에서 슬금슬금 웃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화는 <마녀사냥>의 수위를 넘는다. 소개팅하고 뒤통수 맞은 얘기나 대기업 연구원인데 열쇠 3개를 가져오라는 진상남에 관한 성토까지, ‘노처녀’란 프레임에 갇혀 신음(?)하는 여성들의 고통이 솔직하게 담겼다.

호기심의 대상인 여성들의 백팩 속이 공개되고, ‘<비포선라이즈> 같은 로맨스도 없이 셀룰라이트만 얻은’ 여행 경험담이나 설문조사를 통해 모눈종이처럼 드러난 결혼과 연애에 관한 속내 등이 기사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총각들에게도 ‘일용할 양식’ 되겠다. ‘진짜 결혼이 힘든 이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접근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결혼연애능력시험’을 거쳐 ‘결혼연애문제상담’으로 건너가면 모태솔로가 된, 자신도 몰랐던 이유를 알게 된다. 현대미술 작가 정원연씨가 수능시험지와 꼭 같아 보이는 정교한 문제지를 만들고, 심리상담가 이미림씨가 내면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노처녀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 노출된 노총각까지 진단을 하는데, 설득력 있다. 가령 홀로된 어머니와 사는 노총각들의 상당수는 여성을 볼 때 어머니를 모시고 살 것 같은 착한 여자인가를 최우선 조건으로 꼽는다. 기준이 두 사람 간의 애정이 아니다 보니 성격이 맞지 않아 파국으로 치닫는다. 노총각 생활은 쭉 이어진다. ‘좋은 남자’(?)를 고르기 위해 스펙을 열심히 쌓았으나 갈수록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생각하는, 외모 출중한 여성의 마음의 병도 진단한다.

창간준비호 <줄라이 컴 쉬 윌>의 내지 페이지.
창간준비호 <줄라이 컴 쉬 윌>의 내지 페이지.
독자들에게 살짝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편집장 천준아씨는 기혼이다. 창간준비호를 준비하면서 이씨와의 상담을 통해 결혼에 골인했다. 천씨는 <접속 무비월드>, <영화가 좋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작가다. 그는 다소 일탈적이라도 궁금한, 재밌는 세계를 가진 남자에 빠지곤 했다. 이미림씨는 “남자 보는 안목이 없고 어린아이가 장난감 고르듯 남자를 본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 때 짝사랑했던 이에게 용기를 내 바쁜 방송 일정 중에도 만남을 몇 번 가졌다. 하지만 실망스러웠다. 이미림씨와 상담을 하면서 그 남자를 제대로 못 본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게 됐다. “내가 미성숙한 거고, 그는 매우 ‘훌륭하게 자란 사람’이었다.” 늦은 후회가 밀려올 때 그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 기회를 천씨는 꼭 붙잡았다.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결정적 순간은 창간호 마지막에 만화로 그려 실었다. ‘남자도 거절이 두렵기는 마찬가지 호감은 확실한 행동으로부터’라는 문구를 달고. “창간준비호에 연애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곽정은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그의 실전 연애기술도 도움이 됐다”며 “우리 잡지에 나오면 다들 유명해진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창간준비호 필자였던 김선희씨는 당시만 해도 드라마작가 지망생이었으나 지금 문화방송 월화드라마 <야경꾼 일지>의 작가가 됐다. 준비호까지 합치면 글쟁이나 일러스트작가, 만화가, 사진가, 여행가 등 수십명의 필자가 등장한다. 모두 원고료는 받지 않았다. ‘노처녀’를 주제로 만든다는 천씨의 상상력과 기획력에 흔쾌히 동참했다.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의 내지 페이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의 내지 페이지.
천씨는 “한번 빠지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가수 김건모 팬클럽 회원일 때도 자신의 이름을 ‘천연덕’이라고 짓고 ‘천역덕’스럽게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작가 박민규에 반해 ‘호프’라는 생소한 이름의 일본 담배도 구해 선물로 보냈다. 작가는 작품에 담배 이름을 요긴하게 썼다. 잡지 제작도 그런 그의 뜨거운 성격 때문에 가능했다. 오는 11월에 2호가 나올 예정이다. 인터넷 주문과 인디서적 판매서점을 통해 판매한다. 창간준비호에 빠진 아이템이 지금도 아쉽다. 여성에게 인기가 있는 남성들의 기본 조건을 따져보고 그런 남성들은 주로 어디에 거주하는지, 어떤 여성들과 맺어졌는지 등을 통계 낼 생각이었다. ‘그 많던 남자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역시나 도발적인 제목을 준비했었다. 대신 ‘엠비티아이(MBTI·성격유형검사) 성향으로 본 노처녀 사랑 유형’을 실었다. 준비호에는 특종도 있다. 여성용 자위도구인 딜도는 택배 배송장 품목란에 ‘식품’이라고 표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설문조사를 많이 하다 보니 의외로 연애나 결혼보다 일과 이직, 경제적인 부분의 고민이 많았다. 더 놀라운 것은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는 이유로 ‘못생겼다’를 꼽은 이가 많다는 점이었다.” 그는 요즘 밀려드는 강의와 인터뷰 요청에 즐거운 미소를 짓는다. “이해관계 안 따지고 좋아하는 일에 빠진다. 그게 다시 (인생의) 다음 문을 열어줬다.” 그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희망사항은 한가지다. “잡지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성숙해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것.”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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