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라이프
도심주행용으로 인기몰이중인 크루저 보드…10~20대 중심인 스케이트보드보다 다양한 연령대 즐겨
어려운 기술 해내며
성취감 느끼는 대신
더 빠르고 쉽게 굴러가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기도
도심주행용으로 인기몰이중인 크루저 보드…10~20대 중심인 스케이트보드보다 다양한 연령대 즐겨
어려운 기술 해내며
성취감 느끼는 대신
더 빠르고 쉽게 굴러가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기도
지난 6월12일 서울 한강공원 반포지구 한켠 운동장에는 늦게까지 사람들이 북적였다. 밤 9시가 넘도록 보드 수입·판매업체 보드코리아에서 여는 ‘크루저 보드 강습’이 한창이다. 10명씩 팀을 이뤄 크루저 보드를 배우는 이들은 10대에서 40대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크루저 보드’(cruiser board)는 흔히 보던 스케이트보드보다 길이는 짧고 바퀴는 더 큰 보드를 말한다. 길이가 28~32인치인 스탠더드 스케이트보드나 36인치를 넘는 롱 스케이트보드에 비해 27인치를 넘지 않는 크루저 보드는 작고 가볍다.
짧은 반바지를 입은 20대 여성, 등산복을 입은 40대 남성 등과 함께 크루저 보드 타는 법을 배워보았다. 보드 강습은 4개의 바퀴가 달린 가로 15㎝, 세로 57㎝ 보드 위에 발을 얹는 것부터 시작한다. 한쪽 발을 보드 위에 안쪽으로 비스듬히 얹고 다른 발로 땅을 굴러 속도를 낸 뒤(푸시 오프) 두 발을 보드 위에 나란히 올리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전거처럼 한번 몸의 균형을 익히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고 했다.
주행 기본을 가르치는 크루저 보드 강습에서는 푸시 오프, 발로 판의 한쪽을 지긋이 눌러 회전하는 기술(턴), 보드를 타고 걷는 듯한 동작(틱택)을 배우게 된다. 대부분 1시간 정도 배우면 달리고 멈출 수 있게 되고, 강습에 두번 정도 참가하면 틱택까지는 할 수 있다고 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보드에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싣는 법만 익혀도 절반은 성공이다. 거리로 나서려면 장애물을 피할 수 있도록 턴과 틱택까지 익혀야 한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은 회전이나 점프, 내리막길에서 빠른 속도로 달리기 등 어려운 기술을 해내면서 성취감을 즐긴다. 짧고 뒷면이 솟아 있는 크루저 보드로는 그런 기술을 해내기는 어렵지만 대신 바퀴가 크기 때문에 스케이트보드보다 더 빠르고 쉽게 잘 굴러간다. 보드코리아 송치수 대표는 “흔히 크루저 보드는 초보자들이 배우기 쉽다고들 생각하지만 실은 쓰임새가 달라서 그런 거다. 스케이트보드로 하는 트릭(묘기)을 익히지 않고 그저 타고 다니기만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매주 수·목·토요일 저녁이면 한강공원에서 보드 강습을 해온 송치수 대표는 요즘 보드 인구의 변화를 실감한다. 예전엔 공원에 모여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10~20대 초반 남자들이었다. 요즘은 평일엔 60명, 주말엔 100명 정도로 강습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10배는 넘게 늘어난데다가 40% 정도는 여성들이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어린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네이버 크루저 보드 카페(http://cafe.naver.com/stereovinylcruiser) 회원들도 비슷하다. 카페 운영자 서호진(22·대학생)씨는 “2012년 처음 카페를 만들었을 때는 회원수가 6000명 정도였는데 지난해 4만3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중 여자 회원이 39%이고, 40대도 8.3%를 차지한다”고 했다. 낚시하는 사람들이 바람의 냄새를 맡듯 크루저 보드를 타는 사람들은 햇살을 살핀다. 날씨 좋은 날이면 누군가가 “뜨자!”고 제안하고 번개모임처럼 모여서 함께 크루저 보드를 탄다. 회사원, 헤어디자이너, 직업군인, 바리스타, 음악가, 패션디자이너 등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보드를 탄다. 예전에 보드는 소수 마니아들의 스포츠였다. 모르는 사람에겐 보드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했다. 크루저 보드가 퍼지면서 보드코리아 말고도 한강공원에서 보드를 가르쳐주는 업체들이 여럿 생겼다. 이 카페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즐겨 모이는 ‘보드 스팟’으로 꼽는 지역은 90곳 정도 된다.
공원에만 있던 보드가 거리로 나왔다. 지난해부터는 22인치라는 짧은 길이에 화려한 색감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미니 크루저 보드가 유행하면서 강남이나 홍대앞 거리에는 크루저 보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 장터 옥션(www.auction.co.kr)에서 꼽아보니 올해 1월부터 6월10일까지 크루저 보드 판매량이 지난해에 비해 385%나 늘었다. 주로 초록, 파랑, 노랑, 빨강 등 형형색색의 작고 가벼운 보드가 인기다. 서호진씨도 “원래는 위험해 보여서 보드를 타지 않았는데 외국 거리 패션 사진에서 멋진 힙합 패션을 한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보드를 들고 다니는 모습에 반해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했다. 몇년 전만 해도 헐렁한 티셔츠에 폭넓은 청바지가 보드 패션의 정석이었다면, 요즘엔 아찔한 길이의 짧은 반바지나 트레이닝 복장, 쫙 달라붙는 청바지 등 길거리 유행 패션 어느 것과도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스포츠 패션 브랜드들은 일상적으로 신을 수 있는 보드용 신발을 내놓았다. 보드를 넣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한 백팩도 등장했다.
‘도심 주행용’ 크루저 보드가 유행하면서 자전거족이 닦아놓은 거리를 요즘은 보드족들도 함께 달린다. 홍대 근처에 있는 보드 가게, 보더랜드에서 만난 김창중(27·회사원)씨는 천호동 집에서 강남 회사까지 20㎞ 거리를 보드를 타고 출퇴근한다고 했다. 크루저 보드와 롱 스케이트보드를 번갈아 탄다는 그는 “보드로 출퇴근한 게 1년쯤 됐는데 처음엔 혼자였지만 이젠 비슷한 보드 출근족들을 제법 스치곤 한다”고 했다. 크루저 보드의 속도는 시속 20~30㎞. 보드로 출근하려면 2시간 정도 걸리지만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있는데다가 퇴근할 때는 가방에 가볍게 넣고 지하철을 탈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서 지내는데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달리는 유일한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바퀴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 송치수 대표도 “보드의 대표적인 매력은 자유”라며 “스키장에서만 탈 수 있는 스키 보드와는 달리 스케이트보드는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일단 한번 자유에 맛들이면 회사나 학교를 가다가도 매끄럽고 평평한 바닥만 보면 보드 탈 생각부터 하게 된다. 보드 중독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증상이 여러번 거듭되면 그다음에는 알리(보드에 발을 붙여 점프하는 것)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단다. 본격적인 보드 중독의 시작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옥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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