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밥은 굶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와 ‘은퇴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상 둘 다 틀렸다. 식당은 언제든 망할 수 있고, 그러면 요리사도 굶는다. 은퇴? 정년은 없다. 그러나 선배들을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칼을 놓는다. 우선 눈이 안 보인다. 노련하니 내 손가락은 썰지 않겠지만, 멀리 보이는 게 애호박인지 오이인지 구별이 안 간다. 굼뜨고 더뎌진다. 나이가 들어서 후배들에게 잔소리는 는다.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국 재킷 벗어놓고 칼을 던진다. 푼돈이라도 모아둔 게 있으면 식당 차려 홀을 관리한다. 주방에서 은퇴하는 거다. 그런데 이 바닥에서 홀(서비스)은 오래된 전문가가 드물다. 그러니 은퇴도 없다. 오래 하지 않으니 은퇴도 없는 것이다.(데뷔 3년 만에 사라지는 걸 ‘은퇴’라고 표현하는 건 연예판에서나 하는 말이다. 적어도 은퇴라면 귀밑머리가 허옇게 되어야 쓸 수 있는 말 아닌가.) 이런 요식업 서비스 세계에 반가운 인물도 있다. 서울 주교동, 아니 을지로4가 우래옥의 거목 김지억(82·사진)이 그다. 1962년 5월 박정희 정권이 화폐개혁할 때 입사했으니 장장 입사 53년차쯤 된다. 사원으로 시작해서 상무를 거쳐 이젠 전무다.
정확히 11시 반에 우래옥은 문을 연다. 그와 아침나절에 담소를 나누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오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운신하는 그가 꼿꼿하게 서서 손님을 맞는다. 단골 여부나 나이는 따지지도 않고 가게에 오는 손님은 모두 제대로 공대다. 그의 53년차 서비스 비결이다. 외국 나가서 할아버지 웨이터를 보고선 한국인들은 아쉬워한다. 한국엔 이런 문화가 없다고, 걱정 마시라. 우래옥 홀 입구, 2층 올라가는 계단 밑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전설의 지배인 김지억 전무니까 말이다.
손님에겐 한없이 공손한 그도 직원들에게는 불호령 평양 할아버지다. “이보라! 냉면 저쪽에 가져다 드리라!” 쩌렁쩌렁하다. 우래옥은 엄밀히 말해 북한음식점이다. 여름 한철은 그저 냉면집으로 불린다. 한때 3000그릇 가까이 냉면을 팔았던 전설의 면옥이기도 하다. 그가 팔아치운 냉면의 사리를 연결하면 지구를 세 바퀴 반 돈다.(나의 마구잡이 계산이다.) 입사해서 그 자리에서 53년을 보낸다, 막막한 일이다. 그가 보낸 세월이 짐작이 간다. 대통령도 수없이 ‘갈았다’. 대부분의 주요 정치인과 대통령이 김 전무의 서비스를 받았다. 그에게 ‘냉면 맛이 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우래옥 냉면은, 안 변하오. 똑같소.”
그는 지금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점심으로 냉면을 먹는다. 이 집의 맛은 노옹(老翁)의 노련한 혀로 지켜내는 것일까. 한창때는 하루 두 그릇도 먹었다니 그가 먹은 냉면만 지구 한 바퀴 반이다.(나의 엉터리 계산이다.) 흔히 음식 맛은 주방장이 ‘책임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절반은 홀에서 지켜낼 수도 있다. 맛은 식당 전체의 힘에서 오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출근하는 날까지 우리는 우래옥 냉면은 믿어도 된다. 자, 시원한 냉면 날래 드시라우!
사족이다. 유독 서울의 냉면집에서는 이런 오래된 서비스 장인들을 볼 수 있다. 오장동 함흥냉면집도 그렇다. 연조가 짧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숙달된 서비스를 보여준다. 수십 개의 테이블에서 각기 다르게 주문한 냉면이 제대로 나왔는지 귀신같이 구별하고 내준다. 주방에서 연결된 음식 배출구에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냉면을 양(보통과 곱빼기), 종류(비빔, 섞음, 회냉면)별로 서로 얽히지 않도록 절묘하게 배분한다. 그러면서 손님들의 온갖 불만사항을 다 처리하고 새로 들어온 주문도 연신 마이크로 주방에 일러준다. 한번 그 광경을 유심히 보시라. 식당판 인간문화재가 따로 없다. 아아, 하여튼 냉면의 나날들이 온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