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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로 통제하던 시절

등록 2014-05-07 19:40수정 2014-07-31 09:57

사진 박미향 기자
사진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면은 정치와 역사적 산물이다. 이게 무슨 소리? 이탈리아의 예를 들어보자. 이탈리아는 흔히 (건조) 스파게티를 많이 먹는다고 알고들 있다. 한 수백년 전부터 먹었던 것처럼 여긴다. 사실은 다르다. 우리가 흔하게 보는 건조 스파게티는 원래 남부와 해안도시의 음식이었다. 북부의 평야와 산간지대에서는 쌀, 감자, 옥수수, 촉촉한 면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했다. 결정적으로 건스파게티가 전 국토에 퍼진 대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바로 1, 2차 세계대전이다. 보관 기간이 길고(3년 이상) 요리하기 간편한 스파게티는 궁핍한 전쟁 기간에 더없이 훌륭한 음식이었다. 군인들의 전투식량으로도 아주 좋았다. 언제든 삶기만 하면 소금 뿌려 먹을 수 있었다. 위급할 때는 그냥 먹어도 됐다. 이미 어느 정도 익혀서 말린 국수이기 때문이다. 징집된 병사들이 귀향하면서 건스파게티 문화도 퍼져나갔다. 한국의 면 유행도 그렇다. 임오군란(1882년)은 청의 개입 명분을 주었다. 리훙장이 이끄는 부대가 남대문 앞까지 들어와 진을 치고 대원군을 부를 지경이었다. 군대가 들어오면서 민간인들도 점차 인천에 발을 디뎠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근대 서양식 건축물의 다수는 이때 건너온 중국인 석공기술자들의 작품이다. 음식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두말하면 잔소리인 짜장면은 물론이고 울면(원루몐), 우동(다루몐)도 들어왔다. 다루몐은 비운(?)의 국수다. 원래 우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중국의 겨울 면이다. 뜨끈하게 맑은 육수에 말아낸 국수다.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본명을 고수하다가 이내 ‘우동’으로 불렸다. 외래 국수로 이미 자리잡은 우동의 명성에 기대는(?) 작명법이었으리라. 이제 이 중국식 우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식 우동은 심심하고 순하다. 시금치와 양파, 달걀을 푼 육수에 고명은 갑오징어 정도였다. 고된 70, 80년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더 자극적인 국수에 빠졌다. 바로 짬뽕이다. 더 맵게! 당시 짬뽕의 슬로건이었다. 두 면의 투쟁에서 순하고 부드러운 우동이 밀리다가 끝내 메뉴판에서 사라지고 있다. 간짜장에 곁들여주는 ‘달걀 프라이’(엄밀히 말하면 크리스피 에그. 바닥을 갈색으로 튀기듯 지져 바삭한 프라이)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는 중이다. 이유는 각기 다르다. 우동은 선호도에 밀려서, 크리스피 에그는 인건비 들어가는 일이라 주방에서 꺼리기 때문이다. 부산 같은 지역에서는 아직 이 문화가 살아 있다. 부디 귀찮더라도 그 바삭한 프라이를 지켜주시길!

면이 정치 역사의 산물인 건 우리 면 문화의 토대가 바로 식민지와 전쟁의 근현대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먹는 소면(素麵)은 마치 누대로 먹던 전통음식인 줄 알지만, 실은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국수다. 우리 유년의 기억에 등장하는 동네 국수공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천의 국수 건조기는 일본이 이탈리아의 스파게티에서 받아들인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이탈리아 나폴리에는 그런 국수공장이 흔했다. 이 공장을 조선반도에 설치한 건 물론 일본이었다.

소면과 짜장, 우동 같은 면 음식의 대유행은 미국의 원조 덕이었다. 미국 공법480조(PL480조)에 의한 미국 본토의 잉여 밀가루 공급은 안 그래도 쌀이 부족하던 한국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은 포고령을 통해 쌀 대신 밀가루를 먹도록 강제했다. 식량 문제는 곧 정권 안보의 차원이기도 했다. 중년들의 기억에 생생한 혼분식의 추억은 그렇게 한반도의 정치 역사의 어떤 상징이었던 것이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하얀 미국산 밀가루로 민중을 통제하던 시절이었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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