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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짜릿한 목 통증의 쾌감

등록 2014-02-05 20:15수정 2014-07-31 10:00

[매거진 esc] 국수주의자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 글쓰는 요리사 박찬일씨가 동서양 국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잡지사 기자 시절, 마감 중에 슬쩍 사라지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둘 중 하나. 사우나 아니면 짜장면집이었다. 국수는 나를 위로했다. 단박에 먹어야 한다. 목울대를 훑고 지나가는, 통렬한 한 다발의 국수. 소바를 먹을 때 일본인들이 죽고 못 산다는 목구멍의 감촉, 노도고시(喉越し), 즉 인후통이었던 것이다. 통증을 유발하여 스스로 치유를 행하는 인간의 특별한 버릇. 나는 국수로 그 본능을 알았다. 노도고시는 국수뿐 아니라 목으로 넘기는 무엇이든 통증유발자로 대우한다. 일본 기린 맥주는 아예 동명의 브랜드가 있다. 꿀꺽꿀꺽, 꿀떡꿀떡. 우동 왕국 일본 사누키에서는 우동을 씹지 않아야 한다. 일본 섬 안의 섬 시코쿠(사누키)의 전통이다. 먹는 모습만 봐도 외지인을 구별해낸다. 식도가 씹는 국수, 자학의 국수.

우리나라는 건기가 없다. 쨍쨍 해가 들다가도 언제 한바탕 소나기가 들이칠지 모른다. 국수를 햇볕에 널어 말리는 전통의 국수공장 해먹기 어려운 곳이다. 이제 자연건조를 하는 국수공장은 사실상 명맥이 끊어진 듯하다. 이탈리아 파스타 공장은 나폴리에 몰려 있었다. 그들도 국수를 뽑아 널어 말렸다. 수분 함량 10퍼센트 이하가 되면 세균이 살지 못하고, 보관이 쉬워진다. 스파게티가 유행한 건 당연히 나폴리였다. 그러나 일찌감치 그들의 야외 국수 건조대는 사라졌다. 열풍으로 말리는 기술이 도입된 것이다. 한국은 더 오래 살아남았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동네마다 한두 개씩 있었다. 국수공장 주인은 두 가지를 조심해야 했다. 하나는 느닷없는 비, 그리고 아이들. 그들 틈에 내가 있었다. 늘 배를 곯았다. 간식거리는 뭐든 먹어치웠다. 진달래, 아카시아 꽃, 칡은 무료이고 쫀드기와 뽑기, 달고나는 유료였다. 국수는 무료였다. 훔쳤다. 국수 건조대를 지나가며 슬쩍 서너 마디를 툭툭 분질러서 옷에 쑤셔 넣었다. 국수는 손때까지 먹어서 더 짭짤했다. 덜 마른 국수는 밀가루 풋내가 났다. 잘 마른 건 햇빛의 기운이 느껴졌다. 잘 마른 걸 고르는 비법은 있었다. 빳빳해서 금시라도 부러질 것처럼 꼿꼿한 걸 고르면 된다. 덜 마른 건 바람이라도 건듯 불면 슬렁거리며 주렴처럼 움직였다. 건조대에 치렁치렁한 국숫발 사이로 공장 주인의 몸피가 보이면 얼른 도망쳤다. 주인에게 한번 잡혔다. 주인이 덕이 있었다. “여기저기 분지르지 말구 한 가닥만 통째로 먹으면 참아줄 텐데, 이놈들.”

비가 오면 공장 직원들이 총동원되어 국수 널을 걷어서 옮겼다. 소나기가 마른 대지에 쏟아질 때 피어오르던 뽀얀 흙에서는 다락방 냄새가 났다. 국수 한 가닥은 한 키가 넘었다. 건조대에 몸을 걸치고 있으므로 결국 두 키가 된다. 완전히 마르기 전에 작두로 잘라서 포장했다. 누런 시멘트 봉지로 가운데만 묶었다. 상표도 없이 공장 앞 판매대에서 팔았다. 궤(상자)가 큰 단위였고, 관(貫, 3.75㎏)으로도 팔았다. 반 관이나 한 관. 그 많은 걸 어찌 먹느냐고?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반 관을 사서 그 절반을 먹었다. 어머니의 증언이다. 그때 목구멍 통증의 즐거움을 알았다. 눈물이 나오도록 삼켜서 삶의 신산함을 잊었던 모양이다. 5학년이면 이미 세상을 알던 때였다.

국수공장에 근로기준법이나 안전시설 같은 건 없었던 시절이었겠다. 신문에 연탄가스 중독만큼은 아니어도 피대에 말려서 숨지거나 손이 잘리는 사람의 소식이 실렸다. 피대는 국수를 뽑는 기계에 걸린 회전운동 부품을 말한다. 상표 없는 국수도 많았으나 이미 가게에는 ‘브랜드’ 국수가 진열되었다. 잘 나가던 닭표 국수는 위조품도 나돌았다. “이날 서대문서는 아무개씨 등 다섯 명을 닭표 국수, 칠면조표 국수를 위조한 혐의로 구속했다.”(1962년 7월28일치 경향신문)

엄마는 ‘닭표 국수’를 사오라고 시켰다. 다 떨어져서 사자표를 사가면 심란해하셨다. 사자표는 2등급 딱지가 붙어 있었다. 누런 밀가루. 요즘엔 더 인기 있을 무표백. 2등급은 거칠었다. 그래도 국수는 신났다. 엄마가 석유곤로(풍로의 일본말)에 불을 붙였다. 양은솥에 부글부글 국수가 끓었다. 다 삶은 국수를 펌프 물에 씻어 헹궜다. 요란하게 햇빛이 쏟아지고, 국숫발은 청량하게 대나무 채반에서 몸을 떨었다. 이미 다 만들어진 장국에 국수를 말았다. 후루룩, 후룩. 잔치국수란 말은 오래된 건 아닌 듯하다. 옛 신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잔치국수 잘하는 집이 많지만 한 프로듀서 친구가 알려준 집이 단골이다. 서울 영등포7가의 한 슈퍼마켓 겸 간이식당. 파천교 지나 브라운스톤 뒤, 철공소 골목에 있다. 손바닥만한 ‘예진식품’(02-633-2056·사진)이다. 투박한 계란말이를 얹어주는데, 멸치향이 아주 진하다.

사진 박찬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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