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와촌리 창고주택 내부. 내부 툇마루가 인상적이다.
[매거진esc] 살고 싶은 집
창고처럼 단순한 외관과 한국적 공간을 우아하게 접목시킨
세종시 연서면 박미라씨의 주택
창고처럼 단순한 외관과 한국적 공간을 우아하게 접목시킨
세종시 연서면 박미라씨의 주택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와촌리. 충청북도 오송역에서 차로 20~30분 정도 떨어진 거리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집이 서 있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 집채에 삼각 지붕, 파도 모양의 골강판으로 마감돼 있어 겉으로 봐선 영락없는 창고다. 허투루 지나칠 법하지만 집과 거리를 좁혀갈수록 남다른 특징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먼저 가로세로 비율이나 집 모양새에서 묘한 황금비율 같은 안정감이 느껴진다. 기와 얹은 한옥 처마는 아니지만 골강판 지붕의 사선 양 날개가 날아갈 듯 가볍고, 집 모퉁이는 종잇장을 접어놓은 것처럼 날렵하다.
전반적으로는 두 덩어리의 집으로, 한채는 92.56㎡(28평), 또 다른 한채가 66.11㎡(20평)다. 두채 가운데를 이은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면 그때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겉으론 분명 창고 같아 보였는데 그 안은 서울 한복판 근사한 카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급스럽다. 현관을 가로질러 난 복도 바로 앞에는 중정이 있는데, 마치 미술관 정원처럼 단정하다. 화강암을 군데군데 박아넣은 땅 귀퉁이엔 들꽃이 매서운 한파를 뚫고 새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정원의 여백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선 건물 한채는 주택이고, 나머지는 집주인의 작업실 겸 창고다.
복합적이면서 열린 공간 가능성
탐색해온 정현아 건축가 작품
주인 살림살이까지
세심하게 설계에 반영
절제 속 고상한 아름다움 돋보여 주택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두번째 반전이 기다린다. 새하얀 벽면의 널찍한 거실 겸 부엌이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제대로 뽐낸다. 부엌 쪽에는 기다란 아일랜드 싱크대가, 그 옆에는 고가구 그릇장이 놓여 있다. 가운데는 인도네시아 티크로 단정하게 짠 나무식탁이 자리잡았고 양쪽으로 큰 유리창이 마주 보고 섰다. 남쪽 창으로는 동네 풍경과 언덕이, 맞은편 창으로는 중정이 보여 자연을 그대로 집 안까지 들여왔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랄까, 단출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는 고상한 집이라는 걸 그제야 확연히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툇마루다. 가운데 거실이 밑으로 좀 내려와 있어 마루를 밟고 올라서야 양쪽에 놓인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거실이 탁자와 의자를 놓은 입식이라면 방은 완전히 좌식이다. 마루가 깔려 있는 침실이나 손님방과 달리, 차를 마시는 다실에는 다다미를 놓았다. 다실 문은 이중으로 돼 있는데 한지 바른 여닫이창을 열면 골강판으로 된 덧문이 나온다. 이 두개의 문을 열면 중정을 내다볼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실의 문과 현관문이 나란히 일직선으로 뚫려 문을 모두 열면 집 밖 정원에 서 있는 배롱나무가 보인다. 대놓고 화려하지 않게, 은근하면서도 욕심껏 멋을 부린 집이다.
“이곳은 그냥 시골 동네죠. 우사도 있고, 촌집도 있는…. 주변과 달리 이 집만 유난히 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어요. 너무 고급스럽고 멋져 보이는 집이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고전적인 품위를 지닌 집을 원했거든요. 그런 설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많지는 않다더라고요.”
건축주 박미라(35·삼밭 대표)씨의 말이다. 박씨는 서울에서 패션디자이너로 10년 남짓 일한 바 있다. 디자인을 그만두고 한방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사를 살려 홍삼 제조 일을 하던 중 귀촌을 마음먹고 건축가를 찾아나섰다. 그때 만난 사람이 ‘한국의 젊은 건축가’로 이름을 알린 디아건축 정현아 소장이었다. 오랫동안 복합적이면서도 열려 있는 공간의 가능성을 탐구해온 정 소장은 이 집에 대해 “골강판으로 주변의 우사나 창고들처럼 가볍게 짓고자 했고, 대청·중정·다실 같은 한국적 공간을 다시 해석하는 일도 즐거웠다”고 설명했다.
공간과 공간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변주되는 칸 구조는 한옥의 중층적인 특색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집 두채를 잇고 있는 중정처럼, 주택 안에서도 양끝으로 놓인 방을 대청 격인 거실이 잇고 있다. 창고 같은 집 모양이 이웃의 축사와 닮도록 한 것도, 집 밖 경치를 풍부하게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전통 건축을 계승했다. 물결무늬 골강판 지붕은 집 앞 인삼밭의 층층이 진 그늘막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집이 주변 경관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는 한옥 설계의 디자인 미학을 가져온 셈이다.
“부모님이 인삼농사를 하시거든요. 집 앞에 만들어둔 밭에도 곧 5년근짜리 삼을 심을 예정입니다. 겨우내 언 땅이 녹아 밭에 삼을 심고 삼포가 완성되면 집과 더욱 잘 어울리겠죠.”(박미라)
동양 문화를 즐기는 건축주의 취향과 정 소장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계를 마치고 지난해 6월 착공해 넉달 동안 집을 지어 10월에 완공했다. 건축가는 경량 철골 조립으로 빠르게 지어 공사비를 절감했고, 주택에는 유리단열재를 써서 난방에 신경 썼다. 벽에 손을 갖다대보니 영하의 날씨임에도 찬 기운이 없다. 작은 난로를 켜놓으면 공기 순환이 잘돼 후끈후끈 온기가 돌고, 보일러는 저녁부터 두세시간 잠깐만 틀어도 따뜻해 시골집치고는 난방비가 싼 편이란다. 큰 창을 통해 햇살이 거의 온종일 비치는 것도 비용 절감에 큰 도움을 준다.
한국 고가구며 빈티지 물건을 좋아하는 박씨는 20대부터 모은 그릇과 찻잔이 많다. 집을 지을 때 정 소장은 집주인이 가진 가구·신발·옷 같은 살림살이 부피까지 세심하게 체크하며 수납 공간을 넣었고 설계에 반영했다. 건축주도 애써 지은 집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소품 하나까지 구석구석 신경 쓴 티가 뚜렷하다. 정원에 열린 모과를 함지에 넣어 장식한 것이나 꽃 한송이를 무심하게 꽂아둔 것도 디자이너 출신답게 무척 감각적이다. 집 곳곳에 놓인 목각인형도 나무가구와 궁합이 맞는다. 작가 차수호씨가 깎은 나무소년들은 표정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해학이 넘쳐 집의 느낌과 잘 어울린다.
중정을 지나 맞은편에 자리잡은 창고 겸 작업실은 샌드위치 패널로 만들었다. 홍삼을 추출하는 기계며 커다란 도구들로 여러 복잡한 일을 해야 하는 곳이라 집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작업실 문을 열면 큰 창고가 나오는데, 이런 넓은 공간은 살림살이가 많고 각종 식자재며 약초를 대량으로 보관해야 할 시골집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소다.
“일하기도 살기도 좋지만, 이 집은 반전의 매력이 가득한 마술창고 같아요.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처럼 일상을 단순하게 살고 싶었어요. 이 집이 그런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절제된 것이 가장 아름답죠.”
모과나무에서 노랗게 익어 떨어진 열매 하나를 건네며 배웅하러 나서던 집주인이 말했다.
세종/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탐색해온 정현아 건축가 작품
주인 살림살이까지
세심하게 설계에 반영
절제 속 고상한 아름다움 돋보여 주택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두번째 반전이 기다린다. 새하얀 벽면의 널찍한 거실 겸 부엌이 단순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제대로 뽐낸다. 부엌 쪽에는 기다란 아일랜드 싱크대가, 그 옆에는 고가구 그릇장이 놓여 있다. 가운데는 인도네시아 티크로 단정하게 짠 나무식탁이 자리잡았고 양쪽으로 큰 유리창이 마주 보고 섰다. 남쪽 창으로는 동네 풍경과 언덕이, 맞은편 창으로는 중정이 보여 자연을 그대로 집 안까지 들여왔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랄까, 단출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는 고상한 집이라는 걸 그제야 확연히 알 수 있다.
2 목각인형 작가 차수호씨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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