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주민센터 인근 계단에 그려진 꽃 그림. ‘새끼’에서 벽화를 배운 주민들이 그렸다.
[매거진 esc/요리]
저렴한 임대료, 한적한 동네 분위기로 예술가와 작은 식당·카페 주인들이 모여 바꾸는 연남동 풍경
저렴한 임대료, 한적한 동네 분위기로 예술가와 작은 식당·카페 주인들이 모여 바꾸는 연남동 풍경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있어서 때가 되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동네에 카페나 책방, 공방 등을 만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 같다. 서울의 수많은 골목들이 그 손길을 탔다. 이번에는 서울 마포구 연남동이다. 연희동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항철도가 지나는 도로 양옆이 다 연남동이지만 요즘 뜬다는 동네는 연희동과 붙은 오른쪽이다. 본래 이 동네는 화교들의 중식당과 푸짐하고 싼 기사식당만이 즐비했다. 올해 초부터 작은 카페와 밥집, 책방과 공방이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몇달 만에 10곳이 넘는다.
지난 10월 문 연 ‘경성초밥’ 주인 허은진(35), 박영준(35)씨는 번잡한 “홍익대(먹자골목)에 지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연남동으로 왔다. 허씨는 10년 경력의 일식 셰프다. 7년간 홍익대 먹자골목에서 일본식 선술집을 했던 그는 두런두런 동네 인심이 살아있는 이곳이 좋다. “지난주에는 사진동호회가 동네를 쫙 훑고 갔어요.”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거리는 동진시장 바로 뒷골목과 그 앞 대도로, 연남동주민센터로 이어지는 길공원길이다. 동진시장은 이름만 시장일 뿐, 인근의 그랜드백화점이 생긴 뒤 급속히 쇠락해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바로 그 뒷골목이 요즘 뜬다. 이태원의 한 골목을 구기고 구겨서 뭉쳐놓은 듯하다.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가는 골목 양옆에 타이 사람인 산토 오파스가 총주방장인 타이음식 전문점인 ‘툭툭 누들타이’, 일본식 가정음식을 하는 ‘40키친’, 카레 전문점 ‘히메지’, 달팽이요리, 파스타와 와인이 있는 서양음식점 ‘13’, 멕시코음식점인 ‘베무쵸 칸티나’가 가족처럼 붙어 있다. ‘40키친’의 주인 조영주(27)씨는 나이에 맞지 않게 고풍스러운 장식물을 좋아한다. 70년대의 보온병부터 낡은 전화기, 세월의 테가 물씬 박힌 포스터 등이 가게에 가득하다. “원래 옛날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그런지 우연히 (이 동네) 왔는데 옛날 분위기 미용실도 있고, 정말 좋았어요.” 동대문시장의 옷 디자이너였던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에게서 가정식 음식을 배웠다. 인기 메뉴는 ‘캬베츠 롤’(양배추 롤). 일본 가정에서 손님들에게 주로 내는 음식이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2009년)를 본 이들도 영화에 등장하는 캬베츠 롤이 궁금해 이곳을 찾는다. 조리 시간이 15분이라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두툼한 양배추 덩이를 잘라 그 안에 넉살 좋은 장사꾼의 인심 같은 고기 소를 보면 누구나 활짝 웃게 된다.
지난 25일, ‘히메지’의 문은 닫혀 있었다. ‘10/23~10/30(8일 여행)’이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옆의 각가지 천을 파는 ‘천가게바람’도 운영하는 ‘히메지’의 사장 유재승(35)씨가 최근 결혼을 해 신혼여행 중이기 때문이다. 히메지 창을 두드리는 여행객 손형섭(22)씨가 아쉬워한다. “전에 왔다가 정말 좋아서 다시 왔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 사라진다. 이제 열흘 된 ‘13’의 오너 셰프 문기득(34)씨는 같이 일하는 후배와 13살 차이가 나 지은 이름이라고 자랑한다. 와인이 2만~4만원대다. ‘베무쵸 칸티나’는 미국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멕시코 요리사와 결혼한 한국인 박수진(32)씨가 남편과 운영하는 곳이다. 커피를 이 골목에서 뺄 수는 없다. 커피고수들이 찾는 ‘커피 리브레’가 여기 있다. 여전히 인기가 높다. 좁은 골목을 대형 자가용으로 밀고 들어와 딱 막고 ‘커피 리브레’의 커피 한잔 받아 떠나는 얌체족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커피상점 이심’은 바리스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은 로스터리 커피 전문점이다. 터키식 커피뿐만 아니라 주인이 블렌딩한 커피도 맛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한쪽에는 수북한 커피 자루가 보이고, 콩 볶는 소리가 음악 같다. 3년 전에 열었으니 골목 장수가게다.
이 골목은 소박한 볼거리도 넘친다. ‘덤 타임’은 유민정(38), 승정(34)씨 자매의 옷가게인데, 조금 남다르다. 자매가 디자인한 잠옷, 여행복부터 강아지 옷까지 판다. 각종 영화제를 돌면서 어렵게 받아낸 유명인의 사인을 판다. 승정씨는 “유명도와 작고했는지 여부가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며 웃는다. 음악을 전공했다가 영화가 좋아 파리 유학을 간 민정씨가 모은 거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빔 벤더스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송혜교, 이영애, 설치작가 이불 등 다채롭다. 10만원대에서 100만원대까지 있다. “아직 팔아본 적은 없어요.” 그저 옷가게의 유머 코드를 넣은 것이다. 7년 경력의 가죽공예 디자이너인 이강미(29)의 공방, ‘1에스티 4프릴’과 은공예 공방 ‘은나비공방’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이씨는 “소자본으로 할 만한 공간을 찾다가 여기에 왔다”고 한다. 화려한 홍대 부근보다 임대료가 싸다. 전시 공간 ‘플레이스 막’을 휘둘러보면 ‘책방 피노키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픽 노블 전문인 동네서점이다. 엔지오(NGO) 활동을 했던 이희송(42)씨는 이 골목을 처음 보자마자 “30년 된 집도 있고, 딱 동네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화를 추구했죠. 원래 책과 그래픽 노블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림이 있는 책방으로 불러주세요.” 그의 안목으로 비치한 그래픽 노블과 책들은 대형 서점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다. 아이디어가 빛나는 독립출판물들이나 핸드메이드 책도 눈에 띈다. “외국 누리집 다 뒤져 평이 좋은 원서를 직접 구해요. 사람들과 얼굴 마주 보며 책 얘기하고 팔 수 있는 게 동네서점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화교들 중식당·기사식당
즐비하던 골목
작은 카페·밥집·공방·책방들로
오랜 동네 분위기에
출사족들에게도 인기 동진시장 앞 도로변에 자리잡은 ‘시실리: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과 ‘한우포차 아리랑’은 요즘 이 동네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실내 포장마차다. 두곳 다 정환영(43)씨가 주인이다. 도치회, 물곰탕(강릉 지역에서 곰치라 부르는 물메기와 묵은 김치, 무, 대파 등을 섞어 끓인 것), 육사시미 등 신선한 재료로 승부한다. 연남동주민센터로 이어지는 길공원길은 동진시장 뒷골목보다 넓다. 가운데 화단에 들어선 빽빽한 나무들은 지친 도시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봄이면 벚꽃이,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려 정취가 그만이다. 길 양쪽으로 맥주와 햄버그스테이크 등을 파는 ‘씨에스타’,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장용해(40)씨의 로스터리 커피 전문점 ‘카페 디자인 이알’이 있다. 커피가 3000원대다. “디자이너에게는 연남동만한 곳이 없어요. 배고픈 예술가들의 피난처죠.” 버블티가 주메뉴인 ‘카페집 연남동, 아는 남자’, 직접 디자인한 아웃도어 의류와 커피, 캠핑용품을 파는 ‘썸씽 아웃’도 있다. 매장 가득한 캠핑장비들을 둘러보기만 해도 즐겁고 이곳의 커피도 수준급이다. 곽문수(35)씨와 동업하는 박지호(33)씨는 “무거운 캠핑 짐 때문에 고통받는 캠핑족, 아빠들을 위해 최대한 가벼운 캠핑 방법을 컨설팅해준다”고 한다. 벽화 등으로 동네를 알록달록 수놓는 이들도 있다. 2002년에 문 연 ‘일상예술창작센터’(대표 김영등)는 창작공간 ‘새끼’를 운영한다. ‘새끼’를 찾은 주민들이 벽화 등을 배워 곳곳에 고양이, 꽃 그림을 그렸다. 벽화 작업을 한 주민 신민기(24)씨는 “쓰레기가 줄었고, 고생한다면서 아이스크림이나 우유를 주는 이들도 있어 좋았다”고 한다. 고불고불 골목에 숨은 벽화를 찾아 도는 여행도 연남동만의 매력이다. 길공원길 뒷길이나 주변에는 북카페 ‘더 스토리’, ‘연남동 술집 주인’, ‘카페 곤’, ‘그람모키친’, 수제비누 공방 ‘비뉴’, 빵집 ‘베지홀릭’, ‘사과’ 로고가 간판에 있는 술집 ‘스티브 잡술’, 영화 <늑대소년>에 출연한 배우 이민웅(32)씨가 배달도 하는 밥집, ‘밥해주는 남자’ 연남점 등이 포진해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동진시장 앞 도로의 풍경. ‘한우포차 아리랑’.
‘카페집, 아는남자’.
‘40키친’의 캬베츠 롤.
즐비하던 골목
작은 카페·밥집·공방·책방들로
오랜 동네 분위기에
출사족들에게도 인기 동진시장 앞 도로변에 자리잡은 ‘시실리: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과 ‘한우포차 아리랑’은 요즘 이 동네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실내 포장마차다. 두곳 다 정환영(43)씨가 주인이다. 도치회, 물곰탕(강릉 지역에서 곰치라 부르는 물메기와 묵은 김치, 무, 대파 등을 섞어 끓인 것), 육사시미 등 신선한 재료로 승부한다. 연남동주민센터로 이어지는 길공원길은 동진시장 뒷골목보다 넓다. 가운데 화단에 들어선 빽빽한 나무들은 지친 도시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봄이면 벚꽃이, 가을에는 낙엽이 흩날려 정취가 그만이다. 길 양쪽으로 맥주와 햄버그스테이크 등을 파는 ‘씨에스타’,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장용해(40)씨의 로스터리 커피 전문점 ‘카페 디자인 이알’이 있다. 커피가 3000원대다. “디자이너에게는 연남동만한 곳이 없어요. 배고픈 예술가들의 피난처죠.” 버블티가 주메뉴인 ‘카페집 연남동, 아는 남자’, 직접 디자인한 아웃도어 의류와 커피, 캠핑용품을 파는 ‘썸씽 아웃’도 있다. 매장 가득한 캠핑장비들을 둘러보기만 해도 즐겁고 이곳의 커피도 수준급이다. 곽문수(35)씨와 동업하는 박지호(33)씨는 “무거운 캠핑 짐 때문에 고통받는 캠핑족, 아빠들을 위해 최대한 가벼운 캠핑 방법을 컨설팅해준다”고 한다. 벽화 등으로 동네를 알록달록 수놓는 이들도 있다. 2002년에 문 연 ‘일상예술창작센터’(대표 김영등)는 창작공간 ‘새끼’를 운영한다. ‘새끼’를 찾은 주민들이 벽화 등을 배워 곳곳에 고양이, 꽃 그림을 그렸다. 벽화 작업을 한 주민 신민기(24)씨는 “쓰레기가 줄었고, 고생한다면서 아이스크림이나 우유를 주는 이들도 있어 좋았다”고 한다. 고불고불 골목에 숨은 벽화를 찾아 도는 여행도 연남동만의 매력이다. 길공원길 뒷길이나 주변에는 북카페 ‘더 스토리’, ‘연남동 술집 주인’, ‘카페 곤’, ‘그람모키친’, 수제비누 공방 ‘비뉴’, 빵집 ‘베지홀릭’, ‘사과’ 로고가 간판에 있는 술집 ‘스티브 잡술’, 영화 <늑대소년>에 출연한 배우 이민웅(32)씨가 배달도 하는 밥집, ‘밥해주는 남자’ 연남점 등이 포진해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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