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직장인들에게 인기
육아일기 등 활용도 다양 8월25일 낮 2시 인천국제공항. 드륵드륵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다니는 이들로 북적인다. 온갖 설렘이 공항청사를 메운다. 여행객들 사이로 20~30대 청년 7명이 나타났다. 이들 손에는 여행가방이 없다. 대신 A4 크기의 스케치북과 연필 몇 자루만 있다. “자, 3시간 뒤 에이치(H), 이 장소에 모여요. 그때 리뷰합니다.” 드로잉화가 오은정(33)씨가 말한다. 이들은 상상마당의 드로잉 강좌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의 수강생들이다. 오씨가 강사다. 2년 된 이 강좌는 정원 20명이 늘 초과다. 10명까지 받는 대기자도 꽉 찬다. 오씨는 30분 정도 지나자 수강생들을 찾아다닌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 들 만도 한데 “어디 있느냐” 문자도 안 남긴다. 집중해서 그릴 때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하나둘씩 모인다. 드로잉을 펼쳐 보인다. “중국인 소녀 그리는데 중국인 20명이 막 몰려드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데, 완전 웃겼어요.” 대학생 김재윤씨 말이다. 이 강좌를 듣는 이들의 직업과 사연은 제각각이다. 권승민(36)씨는 인천공항 엔지니어다. “예전에 연애를 낙서로 했어요. 제가 그린 낙서를 카톡으로 여친에게 보내고, 여친 그림 받고 했어요.”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수강신청을 했다. 이미 퇴직연금을 준비한 그는 “은퇴 후에 할 것, 평생 할 수 있는 것, 정신적인 것”을 찾다가 드로잉을 발견했다. 언젠가 웹툰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다. 그는 이 강좌에서 드로잉 기술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업무 스트레스 많을 때 그려요. 마음이 바로 가라앉죠.”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이면지에 그린 드로잉 작품과 연필이 항상 있다. 수학 교사 윤예지(27)씨는 스케치북이 무서웠다. “멋있게 그려야만 하는 공간”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드로잉은 누구나 쉽게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그릴 수 있는,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과 같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스케치북을 꺼낸다. 선은 진해지고 비명을 지르듯 날카롭게 뻗는다. 그저 “기록하고 싶은” 생각에 수강한 문진희(27)씨의 일상도 달라졌다. 이 강좌를 듣고 난 다음부터 회사 동료들에게 “활기차졌다, 좋아 보인다”는 칭찬을 듣는다.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나갈 때면 가방에는 스케치북과 연필이 있다. 카페에서도 냅킨 조각에 드로잉을 한다.
9. 3·5호선 지하철 종로3가역 풍경과 그것을 그린 강정진씨 작품. 10. 전업주부 문명예씨가 딸 유진이를 그렸다.
좋은 드로잉은 기술보다
나의 내면을 응시해야 수강생들은 “그림을 잘 그리게 된 것보다 삶 자체가 달라졌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오씨는 “드로잉은 기술이 아닙니다. ‘나 아파, 너 보고 싶어’처럼 그냥 표현입니다.” 그는 최소한의 연습방법과, 강좌를 마친 뒤에도 계속 그릴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수업방식은 독특하다. 게임개발자인 김승복(29)씨는 “초반에 당황했죠. 4주가 지나는데도 그림은 안 가르치는 거예요.” 오씨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무서워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를 발표하게 한다. 숙제는 쉽지 않다. 시든 노래든 퍼포먼스 등 자기만의 방식을 동원해야 한다. “어떤 수강생은 유치원 때부터 30대까지 찍은 명함사진을 음악과 함께 보여줬는데 모두 감동했죠.” 막상 망설이던 이들도 한 사람이 마음을 활짝 열어 고백하듯 자신을 드러내면 용기를 낸다. “좋은 드로잉을 그리려면 자기와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수강생들은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연필을 들기 시작한다. 드로잉은 시각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자기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스케치북에 컵이 그려져 있든 누이가 있든 야구공이 있든, 출발선은 언제나 자신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 내 삶을 음미하고 생각하는 법을 드로잉을 통해 알게 되죠.” 오씨의 말이다. 그림은 쉽게 타인의 공감도 얻어낸다. 김승복씨는 “예전에 뻔했던 것들, 지나쳤던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릴 게 김씨의 눈에는 넘쳤다. 사람도 다르게 보였다. 자세히 관찰을 하다 보니 몰랐던 ‘그 사람’이 보였다. “내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에 대응 방식도 달라졌어요.” 그런 자신이 앞으로 기대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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