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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보다 묵직하고 쌉싸름한 이 손맛!

등록 2012-06-13 18:45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바디감·청량감·맛·무게감·보존성 측면에서 따져본 궁극의 펜은?
와인이나 커피의 맛을 논함에 있어 흔히 바디감, 무게감, 균형감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만, 펜 맛(선 맛과 손맛)이야말로 이러한 용어들이 적용되어야 할 분야다. 무엇보다도 펜에는 확실하게 만져지는 바디가 있다. 그 바디에는 무게감도, 균형감도 있다. 물론 맛과 향도 있다. 커피와 와인만큼이나 다양하고 멋들어진.

하여, 필자, 펜 맛을 결정짓는 5대 요소를 논함으로써 이 시대 펜들이 진정 나아갈 바를 밝히고자 할 따름이니라.

알루미늄 펜대 가볍고 견고해
섬세한 펜촉은 펜의 심장
무게보다 중요한 건 균형감

1. 바디감 펜대 주로 연필의 바디로 쓰이는 나무는 가벼운 천연재료라는 장점 외에도, ‘연필 깎는 맛’이라는 강력한 보너스까지 선사한다. 사각사각 깎여나가는 연필밥, 모양 좋게 살아나는 연필심, 그리고 은근히 퍼져나가는 향나무 냄새는 좋은 와인 및 커피 한 모금의 온기에 필적한다. 하지만 나무는 연필의 범주를 벗어나는 순간, 극도로 희귀한 재료가 돼 버리므로, 안타깝지만 우리의 논의에서는 제외.

사실 펜대 재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플라스틱인데, 필시 지금쯤 국내 성냥개비 총생산량 및 소비량을 추월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모나미 볼펜 및 사인펜에서도 알 수 있듯, 플라스틱은 가볍고 저렴하다는 펜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말하자면 펜 나라 고주몽 같은 존재다.

하지만 이는 종종 양날의 칼날이 되곤 하는데, 플라스틱 펜은 특유의 싼티를 은폐코자 종종 고무밴드 두르기나 깔쭉이(미끄럼 방지 홈) 새기기 등의 수줍은 덧칠을 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대개 단점을 더욱 강조하는 요인이 되고 만다. 진정 훌륭한 재료에는 군더더기가 필요치 않은 법이므로.

마지막으로 금속. 펜대가 금속(스테인리스, 황동 등)인 경우 펜은 당연히 무거워진다. 하지만 과거 중고생급 청소년들이 아버지 책상서랍 깊숙한 곳으로부터 밀반출해내던 은색 파커 만년필 및 볼펜 등의 주재료가 스테인리스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금속은 있어 보인다는 측면에서 여타의 재료들을 압도한다. 최근 알루미늄이 금속재료 대중화의 기린아로 부상하고 있는데, 조금 값이 뛰긴 하지만 견고함, 있어 보이는 재질감, 매트한 촉감 등을 겸비함으로써 금속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일단 필자 혼자로부터는 얻고 있다.

2. 청량감 펜촉(nib) 일반적으로 펜의 장르가 연필계열(샤프펜 포함), 볼펜계열, 만년필계열, 마커계열, 붓펜계열 등으로 나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 펜촉은 펜의 핵심요소다. 이 부위는 필기감뿐 아니라 단단함, 굵기 등 선 맛의 다양한 요소들이 결정되는 부위이기 때문에, 가히 펜의 두뇌이자 심장이라 할 것이다.

뻑뻑함과 부드러움, 유연함과 단단함 사이의 균형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펜촉은 더할 나위 없는 손맛을 안긴다. 하지만 매직, 형광펜 등의 일부 마커계열 펜들은, 상당한 힘을 가해 선을 긋는 경우 청각세포에 식초를 부은 듯한 고주파 마찰음(아아, 생각만으로도 소름 돋는다)을 발생시킴으로써,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 사이에서 청각적 무기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그렇다. 국내 유명 문구용품 회사의 이름이 ‘평화’인 것이 과연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펜촉은 선 맛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다.
펜촉은 선 맛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다.
상의 주머니에 꽂는 만년필 클립
오래전 중고생들
수집품으로 인기

3. 단맛 쓴맛 잉크와 심芯 보통 볼펜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잉크는 볼펜 특유의 늰질늰질함과 미끌미끌함으로 인해 펜의 단맛으로 일컬어지며, 심(연필과 색연필)은 그 단단함과 뻑뻑한 마찰력으로 인해 쓴맛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단순하고도 편의적인 양분법이 늘 그러하듯, 이러한 분류는 현실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미묘한 뉘앙스들을 반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샤프심 모양의 단단한 촉에서 잉크가 배어나오는 ‘라이너’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촉인가 심인가. 단맛인가 쓴맛인가. 만일 펜 메이커들이 샤프의 편리함과 만년필의 혈통적 순수성, 둘 중 하나만을 고집했다면 라이너 같은 훌륭한 펜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단맛은 쓴맛을 전제로 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멋진 펜일수록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

4. 무게감 또는 무게중심 또한, 세상사가 대개 그렇듯, 펜 역시 너무 무거우면 피곤하고 너무 가벼우면 맛이 없다. 그리고 무게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무게중심이다. 머리 쪽인가 꼬리 쪽인가. 아니면 그 사이의 어느 곳인가.

다시 말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균형감이다. 그리고,

5. 보존성 클립 제아무리 좋은 와인이라 해도 보관을 잘못한다면 포도주스에 소주 탄 것만 못하며, 제아무리 맛난 커피라도 컵이 엎어져서 허벅다리를 데친다면 락스만도 못하듯, 허술하고 허약한 클립은 펜의 보존성을 떨어뜨려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아무리 좋은 펜이라도 잃어버리면 말짱 꽝이라는 얘기다.

더구나 클립은 펜의 정체성을 함축해내는 상징적 부위로까지 격상되곤 하는데, 이는 과거, 파커 만년필의 클립만을 떼서 수집, 매매하던 중고생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한데 이런 애들은 꼭 각종 차량 후방에 부착된 엠블럼도 병행 수집하였더랬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현대 쏘나타의 에스(S) 자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기복신앙적 민족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아무튼 펜 맛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도 클립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본 중 하나다.

cover story tip

필자의 선택은?

그렇다. 펜에 대한 취향은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래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으로 필자의 개인적 취향과 용도를 반영한 선택이며, 언급된 회사들로부터 샤프심 한 알 협찬받은 바 없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시고 봐 주실 것.

기록용 평소 종이수첩을 들고 다니는 필자는 시중에서 ‘라이너’(Liner)라고 불리는 펜을 애용한다. 이 펜은 워터프루프 잉크를 채택해 물에도 번지지 않고, 촉의 굵기도 매우 다양하다. 모름지기 펜이란 이런 거다라는 듯 심플한 작대기형 디자인도 훌륭하다.

다만 라이너에는, 다른 펜들에 비해 값이 비싸면서도 펜촉이 쉽게 뭉툭해지거나 꺾어진다는 결정적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코픽사에서 나온 ‘멀티라이너’(사진 위)는 갈아 끼울 수 있는 펜촉(아래)을 내놓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더구나 잉크 역시 갈아 끼울 수 있도록 돼 있어서, 펜대를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멀티라이너의 펜대는 알루미늄이며, 클립 역시 튼튼하다.

물론 단점도 있다. 교체용 촉과 잉크를 아무 데서나 쉽게 구할 수는 없는데다, 일반 라이너들보다 다소 비싸다. 소정의 금전적·시간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드로잉용 필자는 평소 스케치용 노트와펜을 24시간 대기시켜 스케치를 하곤 하는데, 이를 위한 펜은 로트링사의 ‘아트 펜’(사진)이다. 너무 대놓고 ‘아트이시’라서 아트하지 않으면 고소·고발 당할 것 같은 이름이긴 하다만, 사실 이 펜은 가격과 기능에서 제법 합리적이다. 만년필촉 스타일의 촉을 채택한 이 펜은 연필과 볼펜의 중간쯤 되는 감촉으로 꽤 좋은 손맛이 난다. 또한 라이너와는 달리 살짝 흥건하게 배어나는 잉크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잉크 카트리지를 교체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고, 펜대 속에 잉크 카트리지까지 예비로 넣고 다닐 수 있다. 필자 같은 현장 스케치 애호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펜인 것이다.

하지만 이 펜 역시 결정적 단점이 있다. 잉크가 워터프루프가 아니라는 점. 이것은 보존성이 핵심인 드로잉을 위한 펜으로선 상당히 치명적인데, 개선될 순 없는 걸까. 허나, 어머니는 말하셨지. 세상에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정자는 없다고.

글 한동원 소설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장소협찬 핫트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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