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안 열화당에 있는 자료실 겸 문화공간인 ‘도서관+책방’의 책장들.
새 공간개념 만들어낸 파격적 디자인의 책장들
여기, 평생 주인공 자리에 서지 못한 ‘만년 조연’이 있다. 책이 사람들의 애정 어린 손길을 거칠 때, 책장은 그저 그림자처럼 묵묵하게 책을 품고 있었을 뿐이다.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그 음식을 담은 근사한 그릇’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꽂혀 있는 책에만 관심을 쏟을 뿐 책장에는 쉽사리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기, 주연 자리를 꿰찬 책장이 있다. 사무실 가운데 당당히 자리잡기도 하고, 책 읽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 책장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책장을 위해 책이 존재할 뿐이다.
지난 21일 오후 찾은 정림건축의 서울 이화동 본사 8층엔 ‘바닷가 절벽’을 연상케 하는 파격적인 디자인의 책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름도 ‘클리프’(Cliff·절벽)다. 엠디에프(MDF) 목재로 만들어진 이 곡선형의 ‘절벽’은 휴게실 한가운데를 휘감고 있다. 2009년 말 사내 자료실 공간을 직원용 휴게실로 꾸미면서 만든 이 책장은 잡지를 꽂는 한편 파티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창문을 마주하고 있는 책장 안쪽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어 책장 안쪽은 작은 방이 된다.
“직원들이 책장을 보면서 폭포 앞에서 쉬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책장 모양을 ‘바닷가 절벽’의 자연에서 따왔어요.” 정림건축 엔유디엘(NUDL·비정형설계)팀의 노휘 이사가 이 책장을 디자인했다. 책장뿐 아니라 휴게실 벽과 기둥, 천장에도 웨이브(파도)·히아신스·돌핀(돌고래) 등의 이름이 붙은 장식물이 있어 자연의 느낌을 극대화한다. 노 이사는 “디자인을 색다르게 하면서 기능적인 측면도 최대화해 당시 구독하던 70여가지 잡지의 크기에 맞춰 책장 칸마다 높이를 다르게 짰고, 잡지를 비스듬하게 세울 수 있는 붉은 아크릴판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새 공간 만들고 공연무대 구실도
공간의 중심으로 나온 책장은 공간의 성격 자체를 새롭게 규정한다. ‘산 다미아노’의 책장도 그런 예다. 산 다미아노는 서울 중구 정동길 끝자락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에 있는 북카페다. 근대사 속 시국 선언의 현장이기도 했던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의 건물 1층은 오래전부터 가톨릭 관련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다. 지난해 여름 작은형제회가 토론·모임 공간을 만드는 것을 추진했고, 서점 자리에 작은형제회가 직접 운영하는 북카페 ‘산 다미아노’가 탄생했다.
산 다미아노에 들어서면 하얀 불을 밝힌 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문학작품·종교서적 등 작은형제회가 기증받은 책 4000여권을 꽂아둔 이 책장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이 책을 은은하게 비추도록 설계한 점이 특징이다. 산 다미아노를 설계한 ‘도시건축연구소 0_1 스튜디오’의 조재원 소장은 “책이 단지 장식물이 아니고 건물 공간과 어우러지기를 바라며 이렇게 설계했다”며 “다른 특별한 조명 없이 책장이 자연스럽게 벽의 일부가 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소박한 느낌이 들도록 나왕 나무로 만들었다. ‘산 다미아노’ 운영을 맡고 있는 강신옥 바오로 수사는 “이곳은 여호와의 증인 교도도 무슬림도 올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며 “큰 책장을 통해 책을 읽는 문화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고 말했다. 산 다미아노가 주기적으로 여는 음악 공연은 책장을 배경으로 진행한다.
가구 아닌 역사 살아있는 조형물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미술 전문 출판사인 열화당에도 책장을 이용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도서관+책방’이라고 이름 붙인 이곳에는 유럽의 도서관을 본뜬 것 같은 2층으로 된 서재가 있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의 고서적과 편집부 직원들이 소장하고 있던 책 등 1만여권을 모아둔 이곳에는 일부 책을 보관하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 도서관과 서점을 합친 공간이다. 책장 자체는 특이하지 않지만, 책장 사이의 빈 공간에 그림을 세워 두고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이수정 열화당 기획실장은 “2009년 신관을 증축하면서 처음에는 직원용 도서관을 생각하고 만들었다가 열린 공간으로 꾸며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와 이곳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유럽풍으로 꾸민 데에는 건물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플로리안 바이겔과 필립 크리스투의 영향이 컸다.
서울 서교동 해냄출판사의 5~6층을 차지하고 있는 6m 높이의 책장은 출판사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조형물’에 가깝다. 책장 맨 꼭대기부터 절반 가까이 해냄출판사에서 낸 책이 순서대로 꽂혀 있다. 사다리를 이용해 오고 가며 책을 꽂는 이 책장에는 현재까지 710여가지 책이 꽂혀 있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책이 꽂히고 있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황두진씨가 출판사의 특징을 살리고자 이 책장을 넣었다. 박혜미 편집위원은 “책을 한권 한권 넣다 보면, 역사가 쌓여가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출판사를 찾은 작가들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책장을 보고 책 계약을 결정한 경우도 있었다고 박 편집위원은 말했다.
이처럼 주인공으로 나선 책장은 그 자체로 그림이 되고, 기념비가 되고, 또 무대의 배경이 되고 있다. 2007년부터 100여곳의 책장 사진만 전문적으로 찍어온 사진작가 임수식씨는 “책장은 그 안에 꽂혀 있는 책을 통해 그 사람의 나이, 어린 시절, 심지어 앞으로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초상화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 북카페 ‘산 다미아노’에 있는 조명이 달린 책장.
서울 이화동 정림건축 8층 휴게실에 있는 잡지용 책장 ‘클리프’.
서울 서교동 해냄출판사 5~6층에 있는 6m 높이의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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