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리코멘 - 토마토 루꼴라 라면, 라스토랑 라젠 - 생활의 달인 사골특면, 라면점빵 - 불고기 라면
[매거진 esc]
‘인스턴트 뻔한 맛’ 거부하는 서울 라면집 탐방기
<남자의 자격>의 ‘남자 그리고 아이디어, 라면의 달인’ 편에 등장한 라면들은 재미있다. 매콤한 국물에 와인이 들어가는가 하면 버거가 고명으로 올라간다. 방아잎이나 파인애플이 들어가기도 한다. 닭 육수로 국물을 낸 이경규의 ‘꼬꼬면’은 인터넷에서 화제를 불렀다. 면과 수프를 넣고 4분간 끓이는 규격화된 라면요리법을 단호하게 거부한 라면들이다. 모든 자취생들의 일용할 양식이자 1970년대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했던 라면이 변신중이다.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라멘처럼 면과 국물이 다양해지고 있다. 독특한 맛으로 새로운 라면 세계를 펼치고 있는 서울 시내 소박하면서도 규격화된 인스턴트 맛의 라면을 거부하는 개성 만점의 라면집들을 소개한다.
양천구 목동 <에스비에스> 맞은편 건물 지하에는 ‘라스토랑 라젠’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주방 한쪽에 타임머신처럼 우뚝 서 있는 기계(사진)가 눈에 들어온다. 면을 뽑는 기계다. 라젠에선 면을 직접 만든다. 면 요리는 면의 탄력과 굵기가 중요하다. 라젠의 면은 일반 라면보다 조금 굵고 우동보다는 얇다. 사장 강환일(41)씨는 “음식은 만든 즉시 먹으면 맛있다”고 생각했다. 인스턴트 라면도 예외는 아닐 터. 그는 2년간 청계천 등지의 공구상가를 돌면서 기계 발명에 열중했다.
강씨는 자신만의 비율로 밀가루와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1시간 숙성시킨 뒤 기계에 넣는다. 면은 두가지다. 생면과 유탕면. 생면은 말 그대로 뽑는 면 자체고 유탕면은 카놀라유로 튀긴 면이다. 카놀라유는 유채의 꽃씨를 압착해서 뽑는다. 라면국물은 사골국물이다. 해산물 국물에도 사골국물이 30% 들어간다. 강씨는 “소문난 매운탕집들은 사골국물을 쓴다”고 했다. “진한 맛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인 거죠.” 차림표 첫 줄에 있는 ‘생활의 달인 사골특면’은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커다란 새우가 장군처럼 앉아 있고 면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닭튀김, 쇠고기, 만두, 달걀 등을 발견한다. 1만원이 아깝지 않은 요리다. 주방장 한현우씨가 에스비에스 ‘생활의 달인’에 출연해 선보인 라면이다. 강씨는 “라면은 뻔하다, 싼 음식이다, 라는 선입견을 없애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후루룩 목을 타고 넘어가는 면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장을 향해 속도를 낸다. 소크라테스의 악처처럼 간간이 톡톡 쏘아대는 칼칼한 맛은 신나게 달린 소년처럼 이마에 땀방울을 만든다. ‘라젠’은 라면의 ‘라’와 ‘젠’(zen·선)의 합성어다.(02-6264-7080)
면 뽑아 사골국 넣고 닭·만두·달걀 퐁당
‘토마토 루꼴라 라면’, ‘크림치즈 바질라면’을 본 적이 있는가! 역삼동 뱅뱅사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리코멘’은 이탈리아식 퓨전 라면이 차림표에 가득하다. 파스타 재료로 쓰는 토마토가 모든 라면에 들어간다. 토마토에 있는 리코펜과 라멘의 합성어가 가게 이름이다. “면을 붙이니깐 어색하더라구요.” 주인 오천원(46)씨가 말한다. 그는 호텔에서 일한 경력과 푸드 컨설턴트, 바리스타로 활동한 이력을 십분 살려 2007년 자신의 맛집을 열었다. 90년대 중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다. 식탁에 도착한 ‘토마토 루꼴라 라면’의 향은 눈을 저절로 감게 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숲 한가운데로 순간이동시킨다. 펄럭이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처녀가 된다. 면을 거의 덮은 루콜라(이탈리아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향신채소)의 향은 진하다. ‘크림치즈 바질라면’은 양파, 멸치 등으로 우린 물이 끓을 때쯤 면과 함께 모차렐라 치즈를 넣고 그릇에 담기는 순간 체다치즈가 올라간다. 젓가락으로 휘젓다 보면 쭉쭉 늘어지는 치즈들이 이 사이로 달려든다. 면과 국물, 치즈는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분식집 치즈라면들이 우격다짐으로 넣은 치즈들과 면이 제각각 소리를 지르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통째로 삶은 달걀은 고명이다. “달걀을 풀어 넣으면 텁텁해져서 우리 집 라면과 맞지 않아요.” 면은 삼양라면, 분말수프는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가기도 한다. 그는 녹차빙수도 자신이 처음 개발했다고 말했다. 실험정신이 빛나는 이 집은 지금 강남 직장인들 사이에서 고공행진 중이다.(02-556-7652)
3호선 경복궁역 옆에는 ‘라면점빵’이 있다. 학교 앞 분식점과 별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차림표를 보면 감탄사를 연발한다. 송이라면, 불고기라면, 부대라면, 이미라면, 순두부라면 등 주인장 이은주(57)씨가 발명한 20가지 라면이 있다. 라젠이 수제면을 쓴다면 이 집은 자신만의 국물로 승부한다. 각종 채소들과 특별한 재료 한가지를 넣어 국물을 우린다. “특별한 재료는 말해줄 수 없어요.” 밀가루의 텁텁한 끝맛을 없애주고 면의 기름을 희석시켜준다. 면은 신라면. 분말수프는 라면 종류에 따라 빠지기도, 적은 양이 들어가기도 한다. 보글보글 뚝배기에 ‘불고기라면’과 ‘곰탕라면’, ‘이미라면’이 순서대로 도착한다. ‘곰탕라면’은 뽀얀 국물이 혀에 닿는 순간 하늘의 별이 톡톡 세포에 박힌다. 구수한 ‘곰탕라면’에도 칼칼함은 살아 있다. ‘이미라면’은 일본 돈코쓰라멘을 흉내냈다. ‘이미테이션’을 줄여 이름 붙였다. 돼지고기 조각이 라면 줄에 꽁꽁 묶여 춤을 춘다. 입술에 옅은 기름이 배시시 묻어 혀로 한번 더 훑어야 마무리된다.(02-738-7865)
다양한 고명은 기본, 국물 힘주기는 선택 삼청동 ‘라면 땡기는 날’(사진)의 ‘짬봉라면’도 국물에 힘을 준 라면이다. ‘라면 땡기는 날’은 가회동의 명물이다. 주머니 속에 쏙 넣고 싶은 한옥에서 온갖 낙서를 읽으면서 라면을 먹는다. ‘짬봉라면’의 육수에는 멸치, 다시마, 무, 양파 등과 주인 경춘자(70)씨가 직접 만든 양념이 들어간다. “뚝배기는 빨리 식지 않고 음식 맛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지요.”(02-733-3330)
인사동에는 ‘삼숙이라면’이 있다. 국물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해산물로 우린 국물은 ‘나 잡아봐라’ 소리치며 도망가는 바닷가 연인처럼 개운한 맛을 살짝살짝 선물한다. ‘된장라면’, ‘파라면’, ‘해물라면’, ‘삼숙라면’ 등은 단순하다. 무거운 고명들이 없다. ‘된장라면’은 향긋한 쑥만 올라간다. ‘파라면’도 오로지 파와 면만 있다. ‘삼숙’은 예전 처음 이 집을 연 이들이 3명의 숙자매였기에 생긴 이름이다. 3년 전부터 박정서(54)씨가 주인이다.(02-720-9711)
라면의 변화를 시도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고명이다. ‘치즈’가 대표적이다. 25년 전에 문을 연 신촌의 라면집 ‘신계치’가 원조라고 알려져 있다. ‘신라면, 계란, 치즈’라는 뜻이다.(02-3147-1021) 전복을 고명으로 쓴 명동의 ‘덕이푸드’도 가볼 만하다.(02-776-6538)
일본라멘으로 유명한 ‘하카타분코’도 이달 말 서울 합정역 부근에 ‘한성문고’라는 식당을 차려 돼지고기·닭·생선으로 우린 육수에 수타생면으로 맛을 낸 우리식 라면인 ‘서울라면’을 선보일 예정이다.(02-332-7900)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30FB>도움말 최용민(한국야쿠르트 F&B 유통마케팅팀 차장), 김재성(삼양식품 홍보실 주임), 이정근(농심 마케팅팀 상무)
‘라스토랑 라젠’ 라면 기계
다양한 고명은 기본, 국물 힘주기는 선택 삼청동 ‘라면 땡기는 날’(사진)의 ‘짬봉라면’도 국물에 힘을 준 라면이다. ‘라면 땡기는 날’은 가회동의 명물이다. 주머니 속에 쏙 넣고 싶은 한옥에서 온갖 낙서를 읽으면서 라면을 먹는다. ‘짬봉라면’의 육수에는 멸치, 다시마, 무, 양파 등과 주인 경춘자(70)씨가 직접 만든 양념이 들어간다. “뚝배기는 빨리 식지 않고 음식 맛이 오래가는 장점이 있지요.”(02-733-3330)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