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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만에 영화찍기, 쪼잔함이 필수더라

등록 2010-12-02 16:16수정 2010-12-02 16:22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예산 200만원 독립영화 김미영 기자 스태프 체험기
훅 찬바람이 부니 목은 쏙 자라목처럼 들어간다. 지난 11월27일 새벽 5시, 캄캄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홀로 차에 시동을 건다.

영화 촬영 첫날의 임무는 배우들 픽업이다. 서울 서대문 집에서 동으로 송파구 풍납동과 다시 방향을 틀어 서로 영등포구 대방동을 들러야 한다. 7시까지는 다시 운전대를 돌려 북으로 은평공영차고지에 도착해야 한다. 히터를 켜고 음악을 틀며 생각한다. ‘이 취재를 왜 한다고 했더라….’

# 프롤로그

시작은 이랬다.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와 아이폰으로 영화 찍는 세상에 대해 수다를 떨다 이렇게 영화 찍는 이들이 모두 독립영화 감독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세금 빼고 적금 깨가며 자기 돈 들여 영화 찍는 독립영화 감독들로 수다는 맥락없이 흘렀다. 실제작비 500만원으로 함께 사는 신림동 고시생들과 영화를 찍은 이응일 감독의 <불청객>, 옥탑방 올로케이션으로 영화를 찍어 대박 난 <이웃집 좀비> 등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찌질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많았던가. 그래서 찾아냈다. 제작비 200만원, 준비기간은 한 달, 2회차 촬영으로 완성될 로맨스 영화 <12월1일>이다. 내년 개봉 예정인 <풍선>의 각본을 쓴 전우진 감독과 이 영화를 함께 만드는 스태프들은 한겨레문화센터 영화제작학교 출신 동문들이다. 11월16일부터 28일까지 이들과 함께 시나리오 회의, 배우와 장소 섭외, 배우 미팅과 장소 헌팅, 대본 리허설 등을 체험하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즐거운 고행의 시작이었다.

#1 아침 7시, 배우가 되다

<12월1일>은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한 남자의 이성과 감정의 딜레마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회사 동료인 남녀가 같은 버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 나를 포함한 스태프 9명과 배우 2명이 7017번 버스에 탔다. 은평차고지에서 수색역 앞을 오가는 버스는 오늘 상암동 일대를 돌며 영화 촬영에 쓰일 예정이다. 버스는 기사를 포함해 5시간 빌리는 데 30만원이 들었다.

덜컹, 촬영 장비 세팅이 끝나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간색 터틀넥을 입은 배우 이명행(33)씨와 초록색 목도리를 한 이유미(22)씨가 대본 리허설 과정대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 4년차로 감독이 섭외한 배우 이유미씨는 이번이 첫 독립영화 출연이다. 주로 상업영화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 출연을 결심했다고 했다. 내가 섭외한 이명행씨는 연극배우다. 최근 영화 <아따쿨>로 아시아나단편영화제에 출연해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했다. 부드럽고 지적이면서 적당히(?) 매력적인 외모의 연기자를 찾던 중 <씨네21>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보고 섭외했다. 배우 이정재 닮은꼴의 무명배우, 연기경력 10년차쯤 되는 중견배우, 이름보다 얼굴이 더 유명한 주조연급 남자 배우 등의 섭외와 미팅이 순조롭지 않을 때였다.


카메라에 걸리지 않게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승객으로 자리를 채우라는 감독의 지시가 떨어졌다. 앗, 첫 영화 출연이다. 멍하니 창밖을 보며 앉아 있었더니, 지청구가 돌아온다. “어색해 보여. 그냥 자는 연기가 낫겠어!” 버스 안 조는 승객으로 영화에 데뷔하는 순간이다.

#2 오후 1시, 연출부 막내가 되다

상암동 디엠시(DMC) 건물 앞. 버스에서 내린 남녀가 거리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비가 그쳤다. 커피숍을 섭외해야 할 뻔했는데 다행이다. 선간판이 날아갈 정도로 부는 세찬 바람은 그러려니 했다. 더 큰 문제는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며칠 전 사전 장소 헌팅 때 이곳에 예쁜 낙엽길을 점찍어 뒀는데 그때 몰랐던 방해꾼, 소음이 있었다. 환풍기 소리, 체험학습 나온 아이들의 즐거운 잡음도 영화 찍기엔 방해가 됐다. 결국 다른 골목 끝에 촬영 장비를 세팅했다.

그동안 소품으로 필요한 커피를 사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회사에서도 하지 않는 ‘커피 심부름’이라니. 하지만 연출부 막내들이 하는 잡다한 일들 중 하나다. 감독은 배우의 손에 쥐여줄 ‘커피 두 잔’을 힘줘 정확히 주문했다. 날씨는 춥고 나조차 커피 생각이 간절한데, 다른 스태프들은 어떨까. 200만원 제작비를 떠올리며 내 지갑을 열었다. 스태프 12명이 움직일 때마다 드는 게 돈이다. 밥값, 교통비, 진행비 등등. 독립영화 감독의 쪼잔함, 까짓 이해해 주자.

스타급 배우가 아니라 해도, 독립영화에서 배우는 스태프보다 더 대우받는다. 그래서 내가 또 나섰다. 얇은 옷에 벌벌 떠는 배우 대신, 나와 다른 스태프가 리허설에서 대역을 섰다. 여차저차 거리 촬영이 끝나고 남은 뒷정리 역시 연출부 막내인 내 차지다. 종이컵을 치우는데 뒤에서 부른다. “김미영씨! 이쪽으로 빨리 와!”

#3 오후 3시. 제작부 막내가 되다

배우 및 장소 섭외는 제작부 몫이다.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찾아 사람도, 장소도 잘 찾아내야 한다. 회사 동료인 남녀가 함께 쓸 사무실을 섭외하라고 했을 때 쉽게 가는 길을 택했다.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사무실. 사전 헌팅을 통해 감독에게 쓸만하다는 평가도 받고 회사에도 미리 허가를 받았다.

<12월1일>은 고화질 소니 EX1과 디에스엘아르 카메라인 ‘캐논 EOS 5D MarkⅡ’로 찍는다. <비스티 보이즈> 촬영부였던 전홍규 촬영감독과 <짐승의 끝> 촬영을 한 백문수 촬영감독이 두 카메라를 각각 맡아 다른 장면을 촬영했다. 실외와 달리 실내 촬영은 조명이 필요하다. 사무실이 어두워 무거운 조명 장치가 세팅됐다. 전우진 감독은 “각종 촬영 장비 대여비로만 100만원이 넘게 들었다”며 “조명 장치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내 자리에 내 노트북이 켜지고 배우들이 연기를 시작했다. 영화 <화이트>에서 함께 일한 인연으로 무보수로 전 감독의 독립영화 일을 돕게 된 안대환 동시녹음 감독은 냉장고, 온풍기, 발걸음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사무실을 둘러보던 스태프들이 “책 창고 같다”며 정리 안 된 지저분한 책상들도 예쁘게 봐줬다.

역시 ‘홈타운’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 “인터넷 사용하고 싶은데요” “핸드폰 충전할 수 있을까요” “발판으로 쓸만한 게 없을까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척척 해결이 가능하다. 촬영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위해 회사 앞 중국집을 섭외했다. 스태프들이 감독 눈치를 보며 짬짜면, 볶짜면 등의 5000원대 메뉴들을 주문했다. 그때 한 스태프가 “난 탕짜면”을 외치며 1000원을 감독에게 내밀었다. 하루의 피곤함을 밀어내는 웃음이 터졌다.

#4 저녁 7시, 소품 담당 겸 분장사가 되다

감독의 친구가 사는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 곧 신혼집이 된다는 이곳도 우여곡절 끝에 촬영지로 잡혔다. 감독이 30평대 거실이 넓은 아파트를 섭외하라고 지시를 내렸을 때 어찌해야 하나 막막했다. 집들이 때 봤던 기억을 더듬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지내?” “응, 오랜만이네. 막달이라 둘째가 오늘내일 중 나올 예정이지.” “아~.”

방향을 틀어 건설사의 한 모델하우스를 빌렸다. 감독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생활의 맛이 없다고 했다. 200만원짜리 영화에 ‘배부른 소리’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감독이 직접 오피스텔을 찾았다.

오피스텔에선 다른 여배우가 기다렸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간호사 역을 했던 윤채영(26)씨다. 미팅, 대본 리허설에 이어 벌써 3번째 만남이다. 윤채영씨는 극중 임신 5개월이다. 옷 속에 수건을 두툼하게 말아 넣고 랩을 감았다. 그럴듯했는데 뽀득거리는 비닐 소리가 탈이다. 랩을 풀고 청테이프를 감아 해결했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우연히 이명행씨의 휴대전화 고리가 털실로 짠 딸기임을 발견한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휴대전화 고리 영상을 딸 것을 요구했다. 유난히 빨간색과 초록색에 집착을 보이던 감독은 머쓱했는지 “내가 페티시가 있나?” 하며 눙친다. 그러자 백문수 촬영감독이 말을 잇는다. “어떤 감독은 배우에게 ‘레몬맛으로 대사를 쳐주세요’ 하더라니까.” “셔서 대사를 못하는 것 아니에요?”라며 윤채영씨까지 가담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마지막 촬영은 주차장에서 남자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장면으로 끝났다. 계획보다 이미 1시간이 지나갔다. 촬영은 끝났지만 스태프 일은 끝나지 않았다. 현장에 제일 먼저 나와 가장 늦게 들어가는 게 스태프다. 대중교통이 끊긴 새벽 1시, 같은 방향 스태프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로 하루가 마무리됐다. 배우들은 이틀간의 출연료로 차비 격인 소정의 돈을 받지만 스태프들은 무보수다. 감독이 오늘 하루 함께해준 스태프들에게 ‘맨입에 빈손으로’ 뜨거운 고마움을 표시한다.

# 에필로그

촬영 둘째 날. 저녁 6시, 상암동 디엠시 앞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전날보다 기온이 더 낮아져 영하 5도의 날씨였다. 스태프들은 전날보다 3명이 줄었다. 영화가 좋아도 영화를 생업으로 삼지 않는 이들에게 무보수 일을 계속 부탁할 수는 없다. “독립영화는 봉사와 품앗이로 이뤄진다”는 백문수 촬영감독의 말이 이해가 됐다. 배우와 스태프를 모으는 일부터 장소 섭외, 소품 준비 등 뭐 하나 돈과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게 영화였다.

서대문 일대에서 차량 신을 찍기 위해 이동하는데 눈비가 쏟아진다. 촬영이 중단되고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날씨가 개길 기다렸다. 날씨가 갤지 장담할 수 없어 전 감독에게 촬영을 미루는 것이 어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제작비는 50만원 초과됐고 남은 돈은 5만원밖에 없어요. 내일까지 찍으면 장비 대여비를 감당할 수가 없네요.”

<12월1일> 스태프들이 말하는

‘내게 독립영화’란

촬영감독 백문수: “봉사와 품앗이로 이뤄지는 예술이요.”

녹음감독 안대환: “처음 영화판에 들어서던 옛 생각에 돈 상관없이 하게 되죠.”

감독 전우진: “주변사람에게 끊임없이 민폐를 끼치는 일이요.”

촬영감독 전홍규: “잘 차려지지 않은 밥상이지만 맛있고 즐겁게 먹을 수 있다.”

배우 윤채영: “작은 정성을 모아 훈훈한 결과를 만드는 구세군 냄비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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