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 지방은 사방이 포도밭이다.
[매거진 esc] 부르고뉴 보졸레 지방의 와인, 보졸레, 보졸레 빌라주, 보졸레 크뤼를 맛보다
산과 들이 온통 노랗다. 치자 물을 들인 광목으로 대지를 꽁꽁 싼 것처럼 노란색 물결이다. 와인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보졸레 지역의 11월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대지는 한 해 동안 잘 익은 포도송이를 사람들에게 내주고 바삭거리는 노란 잎들만 남아 흙냄새를 풍긴다.
보졸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남쪽에 자리잡은 와인 산지다. 남북으로 55㎞, 동서로 25㎞에 걸쳐 있는 대규모 와인 산지다. 보졸레라는 이름은 옛 수도 ‘보죄’(Beajeu)에서 유래했다.
시인 기형도는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에서 ‘황폐’와 ‘적막’을 맛보고 ‘목적도 없이 떨어지는’ 포도알 속에서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시 <포도밭 묘지·1>에 적었다. 시인의 감상처럼 수확이 끝난 포도밭은 스산하고 황량하다.
그런데 신기한 노릇이다. 보졸레 지방에서만은 이런 감상이 끝까지 남지 않는다. 스산함은 온데간데없고 붉은 흥분이 대지를 달군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올해는 11월18일)에 전세계에 동시에 출시하는 ‘보졸레 누보’ 때문이다. 프랑스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그해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1985년 법률로 ‘보졸레 누보’만 예외로 두고 있다. 한때 지나친 상업성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해 생산된 와인을 곧바로 마실 수 있는 장점에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때문에 1년 중 이 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는 와인 애호가들이 많다.
보졸레 와인 수확철에는 빨간 포도처럼 사랑도 꽃핀다
‘보졸레 누보’는 ‘그해 보졸레 지역에서 생산된 햇와인’이라는 뜻으로 ‘가메 누아르 아 쥐 블랑’(Gamay Noir a Jus Blanc, 통상 가메라고 부른다)이라는 단일 품종으로 만든다. 4~5주간 짧은 숙성과정을 거쳐 색은 옅고 타닌은 적어 마시기에 가볍다. 보졸레 누보는 벼 수확을 마치고 한잔의 막걸리로 노동의 수고를 위로했던 우리네 농촌처럼 포도 수확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마시던 술이다. 이 술을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든 이는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자인 조르주 뒤뵈프였다. 장기숙성은 힘들지만 다른 품종에 비해 빨리 만들 수 있는 가메의 특성을 잘 활용했다. 그는 복잡한 프랑스식 와인라벨 대신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꽃 라벨을 붙였다. 보졸레의 로마네슈-토랭에 위치한 와인마을 ‘아모 뒤 뱅’에 가면 뒤뵈프의 와인전시장과 양조장 등을 볼 수 있다. 보졸레 누보의 광팬은 일본인이다.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와인을 그 자리에서 마시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생산된 ‘보졸레 누보’의 40%는 일본으로 수출된다. 우리나라도 여러 와인 수입업체가 보졸레 누보를 출시할 예정이지만 열기는 그리 뜨겁지 않다. 만화가 허영만 선생이 와인라벨을 그린 ‘보졸레 누보 랑데부’가 독특하게 눈에 띄는 정도다.
‘꽃과 사랑’을 상징하는 보졸레 누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9월 수확철에는 전세계에서 일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일꾼들은 15~20일간 낮에는 포도를 따고 까만 별이 뜨면 술을 마신다. 그 흥겨움 속에서 영화 <구름 속의 산책>처럼 마술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처럼 인생에서 사랑이 꽃피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젊은 와이너리 주인과 와인 한잔에 ‘눈이 맞아’(?) 아예 정착한 처자들도 많다고 한다. 노동 속에 피는 사랑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와인만큼 뜨겁다.
보졸레는 예부터 와인 명문 산지 부르고뉴에서 천덕꾸러기였다. 피노누아르 같은 장기숙성이 가능한 명품 포도품종은 보졸레 지방의 화강암 토양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가메만은 예외였다. ‘보졸레 누보’ 때문에 부르고뉴에서 찬밥 신세를 겨우 면했지만 보졸레의 포도농장 주인들은 ‘보졸레 누보’가 부담스럽다. 보졸레 지방의 와인을 홍보하는 베랑제르 부샤쿠르는 “보졸레 누보만 알려져 있어서 안타깝다. 다른 부르고뉴의 와인만큼 질 좋은 보졸레 빌라주, 보졸레 크뤼도 있다”고 말한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세 종류가 있다. 석회지대인 보졸레 남쪽에서 주로 생산되는 ‘보졸레’, 북쪽의 화강암·편암지대에서 생산되는 ‘보졸레 빌라주’(Beaujolais Villages)와 ‘보졸레 크뤼’(Beaujolais Crus)이다.
보졸레 빌라주, 보졸레 크뤼가 보졸레 와인의 비상을 꿈꾼다
‘보졸레’는 보졸레 지방의 대표 와인이다. 맛은 보졸레의 와인 중에서 가장 가볍다. ‘보졸레 빌라주’는 38개의 코뮌(읍)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말한다. 붉은색 과일향이 나면서 중후하다. 보졸레보다는 등급이 높다. ‘보졸레 크뤼’는 ‘크뤼’로 지정된 10개의 북쪽 마을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보졸레 와인 중에서 최고급이다. 10대 크뤼는 브루이, 셰나, 시르불레, 코트 드 브루이, 플뢰리, 쥘리에나, 모르공, 물랭아방, 레니에, 생타무르다. 장기숙성을 위한 실험도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본격적인 와인 여행의 첫 방문지는 샤토 데 자크였다. 물랭아방과 셰나를 만드는 와인농장이다. 이곳은 보졸레의 다른 와이너리의 생산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침용 과정에서 탄산을 넣는 방식은 따르지만 포도와 줄기를 함께 넣고 1차 발효를 하는 보졸레식은 따르지 않는다. 침용이란 으깨서 죽처럼 된 포도 덩어리에서 포도 껍질의 까만색 대신 안토시아닌계의 붉은색을 축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침용 기간도 다른 와이너리에 비해 긴 25~30일이다. 3분의 2는 오크통 숙성실로, 3분의 1은 발효통에 그대로 두었다가 섞는 방식을 따른다. 스테인리스와 오크통 사이로 시멘트 발효통이 보인다. 시멘트 발효통이라니! 두께가 15~20㎝인 시멘트 발효통은 특수처리가 되어 있고 온도 조절에 용이하다고 한다. 부르고뉴 지방에서 주로 사용한다.
플뢰리, 모르공, 보졸레 블랑 등을 생산하는 샤토 뒤 사틀라르는 리옹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인 ‘조르주 블랑’의 소믈리에, 파브리스가 극찬한 와이너리다. 포도나무 사이로 잔디를 심어 나무들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경작하고 있다.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고 달의 주기에 맞춰 가지치기를 하는 농법을 사용한다. 샤토 뒤 사틀라르의 2005년산 플뢰리는 피노누아르로 만든 와인이라고 착각이 들 만큼 맛이 깔끔하고 깊이가 있다. 와이너리의 주인, 실뱅 로시에는 “진실은 와인 잔에 있다”며 겸손하게 웃는다. 밝고 건강한 주인장의 풍모에서 자연의 순리를 순박하게 따르는 농부의 모습이 보인다. 16세기 성을 호텔로 개조한 샤토 드 피제는 전통의 맛이 빛난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우리네 참기름병 같은 와인병에서 20년 숙성된 와인이 졸졸 흘러나온다. 프랑스 정부에서 인증하는 유기농 인증 마크가 붙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샤토 드 라 셰즈는 1996년 G7 정상회담 때 힐러리 클린턴을 비롯한 대통령 부인들이 방문한 와이너리이다. 크뤼급 와인을 생산하는 농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메종 코카르’는 독특하고 다양한 집 모양의 라벨을 붙여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집은 소중하다. 젊은이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와인”을 만들고 싶다고 주인 크리스토프 코카르는 말한다.
“테루아를 정직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농부들의 마음이 11월의 보졸레 땅을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미국의 오퍼스원이나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처럼 대형화된 와이너리에서는 볼 수 없는 자존심이 엿보인다.
보졸레=글·사진 박미향 기자mh@hani.co.kr
수확 뒤 미처 따지 못한 포도송이.
샤토 데 자크의 오크통 저장실.
샤토 드 피제의 오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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