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극 활황 뒤에는 경제불황이…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끊임없이 복수극이 재생산되고 인기를 끄는 이유
끊임없이 복수극이 재생산되고 인기를 끄는 이유
미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매컬러프는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의 정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복수’는 자신이 어떤 사람 혹은 집단으로부터 해를 입었다는 느낌에 대한 반응이다. 복수는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피해를 되갚아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행동은 자기가 당한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즉각적인 대결을 피하거나 멈추기 위해서도 아니며, 물질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받은 피해를 되갚아주고자 하는 시도’인 복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창작물과 이야기에서 제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집안끼리의 복수에 희생된 사랑 이야기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누명을 쓰고 10여년 동안 감옥에서 복수를 계획한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자신의 딸을 죽인 이들을 직접 처단하는 강동지의 복수가 펼쳐지는 이인직의 <귀의 성>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복수는 이야기의 주요한 갈등 구조로 다뤄져왔다. 수백년을 이어온 복수의 이야기에 질릴 법도 한데, 왜 이야기 속 그들은 여전히 복수를 다짐하는 걸까?
복수극, 대중들이 빠른 시간 안에 감정 몰입하기 쉬워
복수는 무엇보다 근본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이야기 구조다. 소설가 김중혁씨는 “복수극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해지고, 누군가를 대신해 복수를 할 경우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헌신과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독자나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며 “복수가 진행될수록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되는데 현실에서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하는 그 카타르시스에 대한 쾌감이 마치 사랑 얘기가 그렇듯 수없이 반복돼도 질리지 않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보편적인 취향을 가진 대중을 상대로 빠른 시간에 감정과 감각적 몰입을 이끌어내야 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 복수극은 더없이 매력적인 이야기 구조다. 복수의 이야기가 펼쳐지면 대중문화의 필수요소나 다름없는 액션과 폭력, 성묘사 등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장면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또 복수를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기 때문에 극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데에도 더없이 좋은 장치다.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을 공동집필한 오선형 작가는 “대중적인 힘이 있다는 게 복수극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동시에 복수의 강도나 호흡을 조절하는 게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라고 말한다. 오 작가는 이어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려면 복수를 하는 캐릭터가 잘 만들어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구미호>의 경우 인간의 탐욕에 희생되는 연이와 연이에 대한 복수를 하는 구미호 구산댁의 캐릭터에 가장 공을 들였다”고 덧붙였다. <구미호>는 가해자인 윤두수의 불안감과 죄책감 등이 자세히 묘사되면서 복수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복수극의 마지막을 잘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복수의 이야기 구조는 지금도 반복되지만, 복수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최근 국내 대중문화를 휩쓸고 있는 ‘자극적인 복수’의 경향성은 사회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티브이평론가 김선영씨는 “지난해 대중문화를 휩쓴 ‘막장’ 코드가 깊어지는 사회적 불황의 영향이었던 것처럼 올해 복수가 유독 두드러지는 데에는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불황과 불안감이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얘기”라며 “그럴수록 사람들이 더 강렬한 이야기를 원하고 더 강한 갈등구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길 바란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특히 이혼녀가 권력자인 남편이나 시가에 대항하는 통쾌한 복수나, 연쇄살인범이나 강간범 등 무차별적인 공격에 희생당한 이들을 대신한 사적인 사형집행이 두드러지는 데에는 법과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한몫한다. 복수가 자극적일수록 관객들 심리적 피폐함 느껴 복수가 자극적이 될수록 그 이야기의 끝이 피폐해지는 것 역시 최근 복수극의 특징이다. 1990년대까지의 복수극이 한가지 목적을 향해 가는 권선징악 형식의 복수를 따라가면서 인물이 성공하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2000년대 이후 복수극은 대체로 복수의 덫에 스스로 빠져 파멸하는 결말로 끝난다. 드라마와 영화는 복수로 인해 생겨난 희생에 대한 질문과 과연 죽은 이를 대신해 복수한다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 복수 자체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이들이 복수극을 보는 그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몰라도 티브이를 끄거나 극장을 빠져나올 때는 오히려 심리적 피폐함을 호소한다는 점이다. 복수에 대한 질문마저 비슷한 복수극에 대한 염증과 딜레마에 빠져버린 복수극 자체에 대한 회의나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는 의미다. 복수의 끝을 보여주는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관객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단지 수위 높은 폭력에 대한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복수는 계속된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에 이어 자신을 학대한 이들에 대한 복수로 작은 섬 주민 모두를 학살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의 김복남(서영희)이 기다리고 있다. 또 홍콩누아르의 고전인 <복수혈전>을 리메이크한 <무적자>에서는 형제들의 우정과 통쾌한 복수가 이어질 예정이다.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구미호: 여우누이뎐〉
복수의 이야기 구조는 지금도 반복되지만, 복수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끊임없이 달라진다. 최근 국내 대중문화를 휩쓸고 있는 ‘자극적인 복수’의 경향성은 사회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티브이평론가 김선영씨는 “지난해 대중문화를 휩쓴 ‘막장’ 코드가 깊어지는 사회적 불황의 영향이었던 것처럼 올해 복수가 유독 두드러지는 데에는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불황과 불안감이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얘기”라며 “그럴수록 사람들이 더 강렬한 이야기를 원하고 더 강한 갈등구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길 바란다”고 설명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특히 이혼녀가 권력자인 남편이나 시가에 대항하는 통쾌한 복수나, 연쇄살인범이나 강간범 등 무차별적인 공격에 희생당한 이들을 대신한 사적인 사형집행이 두드러지는 데에는 법과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한몫한다. 복수가 자극적일수록 관객들 심리적 피폐함 느껴 복수가 자극적이 될수록 그 이야기의 끝이 피폐해지는 것 역시 최근 복수극의 특징이다. 1990년대까지의 복수극이 한가지 목적을 향해 가는 권선징악 형식의 복수를 따라가면서 인물이 성공하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2000년대 이후 복수극은 대체로 복수의 덫에 스스로 빠져 파멸하는 결말로 끝난다. 드라마와 영화는 복수로 인해 생겨난 희생에 대한 질문과 과연 죽은 이를 대신해 복수한다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 복수 자체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많은 이들이 복수극을 보는 그 순간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몰라도 티브이를 끄거나 극장을 빠져나올 때는 오히려 심리적 피폐함을 호소한다는 점이다. 복수에 대한 질문마저 비슷한 복수극에 대한 염증과 딜레마에 빠져버린 복수극 자체에 대한 회의나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는 의미다. 복수의 끝을 보여주는 <악마를 보았다>에 대한 관객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단지 수위 높은 폭력에 대한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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