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연 김소현.
[매거진 esc] 김어준이 만난 여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연 김소현
1 1991년 런던에서였다. <미스 사이공>과 <오페라의 유령>을 봤다. 일주일에 5일은 밤기차와 공원 벤치를 안방 삼던 극빈자 신세였음에도. 무려 보름치 식대 털어. 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니까. 그 시절 변방 출신 배낭여행자에게 그 정도 이유면 필요충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예술 vs 허기’류 에피소드의 통상적 결말은 대충 이러하다. 특정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어 그날의 전율은 제 영혼 깊이 음각된다…. 뭐 그런 거.
내게도 그 공연들은 깊은 흔적을 남겼다. 다신 뮤지컬 안 봤으니까. 왜. 하도 억울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니, 안 그럼 나만 무식해진다 싶어, 감동해주고 싶은 마음 절절한데, 대체 어느 대목에서 그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실물 헬기가 극적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음악이 부실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킴의 사랑에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팬텀의 광기에 도무지 감정이입되질 않았다. 그저, 불편했다. 그 불편을 설명할 언어가 당시 내겐 없었지만. 대신 그 여행 내내 팬텀에게서 뺏은 가면에다 라면 끓여 먹는 꿈을 꿨다.
이후 나이 먹어 가며 인간의 사랑이 합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충분히 납득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걸 굳이 뮤지컬의 조력까지 받아 되새김질할 이유는 없었다. 뭐하러. 그렇게 뮤지컬과 결별한 지 거의 20년이 되어 가던 2주 전 어느 날, 모 잡지사에서 공연관람 제안이 왔다. 공연 하나 택해 보고 그 감상을 지면중계하자는 것이었다. 참 뜬금없게도 킴이 떠올랐다. 해서 <미스 사이공>을, 무려 19년 만에, 다시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때 왜 그리 불편했던 건지.
일제 강점기 정신대 여성이 제 가족 몰살시킨 일본군의 장교에게 반해 독립군 정혼자 뿌리치고 그의 아이 임신하더니 해방 후에도 오로지 일본만 꿈꾸다 그 장교 결혼 사실에 충격받고 아이만은 일본에 보내려고 자신은 자살한다. 일본 원작에 제목은 ‘미스 서울’이고. 이걸 우리더러 즐기라면. 미친 거지. <미스 사이공>은, 그런 거다. 오리엔탈리즘 따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건 행패다. 그 백인 남성의 폭력적 판타지에서 인간의 보편 사랑을 느껴내라니. 나는, 그리 못 하겠더라. 결국 중간에 자리 털고 일어서며 생각했다.
근데 왜 극장은 꽉 차는 거지. 내가 놓친 게 있는 건가. 악극 자체가 내 취향과 불화하는 건가. 하긴 난 오페라엔 코까지 고는 놈이지. 내 감수성이 촌스러운 건가. 요즘은 뮤지컬 마니아 적지 않다는데. 뮤지컬 배우 김소현을 만나게 된 출발점은, 그에겐 부당하게도, 그러니까 그렇게 일종의 심통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쩝.
2 그 심통으로 다짜고짜 시비부터 걸었다. <미스 사이공>의 킴은 폭격에 가족이 몰살당했는데, 그럼 아마 북폭이었을 텐데, B52에 의한.(웃음) 그런 원수와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게 말이 되냐고.
“제가 원작자가 아니라서.(웃음)”
음. 그렇지. 그래도 기왕 나선 거 계속 진격. 미군 크리스, 걔는 한 게 없다. 헬기 뜨기 전에 두리번거린 게 전부다.(웃음) 정말 사랑하면 지가 남든가.(웃음) 그리고 왜 와이프를 데리고 돌아와. 미친놈.(폭소)
“동양인 입장에선 그런 면이 많죠. 하지만 여배우 입장에선 굉장히 해보고 싶은 배역이에요. 전쟁 배경으로 첫사랑의 설렘과 이별, 아픔까지. 그렇게 스펙터클한 역할은 잘 없거든요.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이죠. 근데 <오페라의 유령> 이야기를 해주시면 안 되나요?(웃음)”
맞다. <오페라의 유령>의 헤로인이지. 매우 지당한 요구일세. 하지만 일단 내 불만부터. 이번엔 뮤지컬 자체에 대한 시비. 가사 웃기고 동작 과잉되고 서사 통속적인데 춤, 노래만으론 내용 파악도 잘 안된다. 그 원조인 오페라 줄거리는 유치하기까지 하고. 만날 소프라노가 테너 좋아하다 죽어.(폭소)
“아무래도 짧은 시간에 삶의 극적인 면을 보여주려다 보니까 죽음이 필요한 거죠. 시대의 반영이니 현대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밖에 없고. 무대예술의 과잉된 동작 부분은 그런 거 같아요. 영화는 관객을 어떤 장면에 집중시키려면 클로즈업을 하면 되는데 무대 위에선 그걸 하나의 동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연스럽게 동선이 커지는 거죠. 내용 전달은 그래요. 뮤지컬 배우들의 가장 큰 고충이 사실 그건데, 내용을 굉장히 함축해 직접 무대 위에서 노래 하나로 전달해줘야 하니까. 그게 배우도 관객도 쉽지가 않죠. 거기서 취향의 차이가 생기는 거 같아요.”
똑똑한 설명이다. 그럼 악극의 정수가 뭔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현장에서, 살아 있는 걸, 직접 느끼며 교감하는 거죠. 영화는 찍고 또 찍어 편집해 누가 언제 봐도 같은 거지만, 무대에선 아무리 오래 해도 그 어떤 장면도 똑같을 수가 없거든요.”
음. 설득력 있다. 그럼 이건. 서양 건축에서 고딕이니 바로크니 하는 거 결국 그리스·로마에 대한 콤플렉스다. 같은 맥락에서 뮤지컬은 앵글로의 이태리 악극에 대한 반동이다. 꼭 그렇게 심각만 해야 하냐며. 미국 애들이 본격 뮤지컬 만들어낸 건 그래서 이해 간다. 경박하니까.(웃음) 이태리는 그래서 여전히 뮤지컬 안 쳐주고. 근데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나라에선 왜 뮤지컬 마니아가 급증하는 걸까.
“제가 이미 거기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라.(웃음) 객관적 답변이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뮤지컬에 빠진 이유는 생동감이에요. 관객과 일대일로 서로를 호흡하고 느끼거든요. 저는 팬텀을 거의 400회 가까이 똑같은 옷 입고 똑같은 노래를 하는데도 하나도 지겹지 않고 매번 새로워요. 저희 공연을 100번씩 보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대목에서 이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내려와 귀 뒤로 쓸어 넘겼을 뿐인데 그 순간을 포착해내고 거기 의미를 부여해 반응하고 저는 거기 또 호응하고. 그렇게 살아 있는 에너지를 즉석에서 서로 주고받는 게 너무 좋아요.”
음. 확실히 난 모르는 세계군. 그렇지만 그런 일회성, 현장성으로 인한 긴장감과 교감은 무대공연 자체의 특성 아닌가. 꼭 뮤지컬이 아니어도. 서구악극이 고급문화라는 허영이 작동하는 거 아닌가. 그런 혐의는 부당하나.
“칠팔천원짜리 영화와 십만원짜리 뮤지컬 티켓의 가격 차 이상으로 배우와 무대와 의상과 오케스트라와 그 뒤의 스태프가 매일매일 현장에서 노력한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허위의식 묻는데 티켓가격 변호한다. 되묻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당대 뮤지컬 헤로인에게 줄곧 시비만 걸고 앉았기에. 이런 무식, 무례한 놈을 봤나. 여기서 본인 이야기로 급선회. 10년간 뮤지컬에만 미쳤다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자신의 퍼포먼스에 스스로 매료되나. 배우들 특유의 자뻑지수 점검.
“그게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자기만 도취되면 0점이죠. 나만 도취되면 이 일 그만둬야죠. 예를 들어 어떤 장면에서 너무 슬퍼요. 그래서 노랫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엉엉 울어요. 혼자 감정이입되어서. 그럴 땐 난 대단한 공연을 했지만 혼자만 느낀 거거든요. 관객과 교감 없이. 그래서 냉정해지는 게 필요하죠. 내 몸속에서 내가 빠져나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도로.”
호. 인상적인 자율자뻑견제. 역시 어느 분야든 당대의 선수가 되려면 자기 객관화된, 어른이어야 한다. 그럼 둘 다 경험한 사람으로 오페라와 뮤지컬의 차이는 뭔가.
“조심스럽지만.” 왜? “오페라에서 다시 안 불러줄까 봐.”(웃음) “오페라는 마이크를 쓰지 않고 오로지 노래로 감동을 주는 장르라 목소리에 기교를 주면 전달이 안 돼요. 반면 뮤지컬은 좀더 뭉그러진 소리를 내며 연기할 수가 있죠.” 발성의 차이뿐이라면 왜 뮤지컬만 하는 건가. “뮤지컬에 빠져서 오페라 오디션을 못 찾아다니는 거죠. 기회가 더 많기도 하고. 오페라는 한 작품의 공연이 열 번 이하니까.” 돈이 안 되는구나.(폭소) “돈 때문에 뮤지컬 한다면 생업이 되기 힘들죠.” 뮤지컬의 톱 배우여도 그런가. “글쎄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죠. 막 집 사고 그러는 줄 아시는데, 아닙니다. 턱없이 부족합니다. 월세 내는 정도.”(웃음)
그럼 요즘 아이돌 한번 출연하고 몇억원씩 받는 거 열 받지 않나. “시아준수가 뮤지컬 배우 10년치 연봉을 한번에 받고 세종문화회관을 꽉 채웠던데 부럽기는 했어요. 하지만 재수 없거나 밉진 않았어요.” 억울하지는 않고. “억울하면 출세해야죠.(웃음) 만약 무대에서 매력이 없었다면 꼴 보기 싫었을 텐데 충분히 잘하더군요.”(웃음) 하지만 뮤지컬 통해 큰 것도 아니고 뮤지컬에 그 자산을 남길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이용했을 뿐 아닌가. “일본 팬이 한국까지 와서 그 공연을 봤으니까.” 저변 확대의 공을 봐서 너그럽게 봐주는 건가. “제가 여자라서 시아준수에게 좀더 너그러운 걸 수는 있어요.(웃음) 그리고 진심이 느껴졌어요.” 본인은 진심이 없어서 적게 받는 게 아니지 않나. “저요? 저는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이야 그렇다고 쳐도 높은 개런티 받고 잠시 이용만 하고 가버리면 계속 이쪽에 있던 사람들은 박탈감 클 거 아닌가. 예를 들어 여자 아이돌이 본인 자리 뺏었다고 해 봐라. “그럴 일은 없어요. 여자 아이돌이 제 역할을 절대 못 할 거기 때문에.(웃음) 그 꼴을 당하지 않을 역할이라 다행이라 생각합니다.”(웃음)
그런데 애초 성악 했으면서 왜 뮤지컬로 온 건가. “운명적이죠. 그 전에는 전혀 뮤지컬 모르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봤어요. <오페라의 유령>을 미리 알았더라면 떨리고 무서워서 못 봤을 거예요. 너무 큰 자리를 단숨에 얻어서 그에 따르는 대가를 톡톡히 치렀죠.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연습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정말 많이 울고 힘들었죠.” 그걸 10년째 하는 원동력이 뭔가. “2001년 12월4일, 첫 공연의 커튼콜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박수소리. 전원 기립하셨는데 그 눈들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그때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럼 10년간 뮤지컬만 한 건가. “드라마 <왕과 나>의 조치겸 부인 역도 했어요.” 아니 드라마를 왜? “제 이미지가 항상 비슷해서 파격적 변신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게 유일한 외도인가. “연극도 했어요. 한참 방황할 때죠. 나도 다른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랬더니? “아, 내가 잘하는 걸 해야겠구나.”(폭소) 앞으로는. “정말 잘 맞는 역할이 있다면.” 어떤 역할을 잘할 수 있나. “대본 보고 결정하겠습니다.”(웃음)
그렇게 일만 하는데 지난 10년간 연인들이 뭐라고 하던가? “워커홀릭이다, 너무 심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그런 이야기 공통적으로 많이 들었죠.”(웃음) 어느 정도로 심한가. “10년간 여행 한번 못 갔으니까.” 그럼 연애가 보통 어떤 이유로 끝나나? “뮤지컬 때문에. 제가 공주예요.” (폭소) 유쾌한, 공주.
3 70년대 뉴욕 쌍둥이빌딩 사이에서 외줄을 탔던 필리프란 자가 있었다. 한바탕 소동 후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에 잡혀 내려오자 기자들이 물었다. 대체 왜 그랬냐고. 프랑스인이었던 그는 합리적 동기만 따지는 전형적 미국식 사고라며 답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뮤지컬에 몰역사적 서사와 서구에 경도된 딜레당트의 문화적 허영을 따지는 건 지나치게 이성적인가. <미스 사이공>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소비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 건 촌스러운가. 극예술에서 행위의 예술성만 분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혹은 가당한가.
지난 10년간 그 어떤 연인보다 사랑한 뮤지컬에 대한 애정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그를 만나고도, 내 의문은 그렇게 여전하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인정해야겠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김어준이 만난 여자
“여자 아이돌, 제 역할 절대 대신 못하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연 김소현.
김소현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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