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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만 믿어라

등록 2010-05-05 17:26수정 2010-05-09 11:23

잔인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와 1983년작 〈브이〉를 리메이크한 〈2010 브이〉. 오씨엔·채널씨지브이 제공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원작과 설정만 같고 이야기는 다른 ‘2010 브이’와 ‘스파르타쿠스’
선정성·폭력성보다 인간에 대한 강렬한 불신 때문에 ‘19금’ 된 듯
“1983 <브이>(V)는 잊어라!” “영화 <300>과 <글래디에이터>는 잊어라!” 채널씨지브이에서 방영하는 <2010 브이>와 오씨엔에서 방영을 시작한 <스파르타쿠스>는 공교롭게도 기억상실을 강요하는 같은 내용의 홍보 문구를 사용한다. 잊으라고 하면 더 생각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원작 드라마와 영화를 본 이들은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보게 되고, 아직 본 적이 없는 이들은 호기심에 한번쯤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그 결과 <2010 브이>와 <스파르타쿠스>는 평균시청률 2% 안팎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사진 오른쪽)씨와 대중문화평론가 차우진씨가 요즘 화제인 두 편의 미드를 들여다봤다.

너 어제 그거 봤어?
너 어제 그거 봤어?

정석희(이하 정) <2010 브이>를 본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1983년에 방영됐던 추억의 <브이>와 비교하게 된다. 컬러텔레비전이 막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방영됐던 <브이>는 쥐를 먹고 피부를 벗기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차우진(이하 차) 그때는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아침에 했던 외화를 빼놓지 않고 봤다. <키트>나 <에어울프> <에이 특공대> 같은 당시의 인기 드라마가 최근에 다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2010 브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1980년대 <브이>의 줄리엣과 도노반,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2010 브이>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원작과 설정만 같고 이야기나 내용은 다르다. 원작이 외계인과 지구인 간의 싸움을 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과 프랑스 저항군처럼 그렸다면, <2010 브이>는 정치적인 내용이 많다. 외계인이 미디어를 이용하면서 지배해나가는 게 눈에 띈다.

국민의료보험제 등 정치적 이슈도 담아내


흥미로운 점은 외계인들이 지구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의료사업을 가장 먼저 내세우고 의료센터 등을 설립하면서 신뢰를 얻는다는 거다.

이 드라마가 방영됐던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국민의료보험제도였다. 이를 드라마 소재로 가져와서 쓰다니, 재미있다. 설정은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지만 그 얘기를 하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정치적인 문제를 많이 얘기한다. 그런 시각에서 이 드라마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얘기한다. 가족도, 친구도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다. 여자 주인공이 연방수사국(FBI)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들 중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게 현실 같기도 하고, 약간 섬뜩했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거다. 첫회에서 이미 ‘수년 전에 외계인이 침입했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지루하지 않게 얘기를 진행시킨다. 주인공들의 매력이 좀 부족하지만 줄거리가 괜찮고 이야기에 짜임새가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첫회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해 헷갈리기도 했는데, 길게 보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괜찮은 방법이다. 이 드라마의 특수효과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려냈더라. 놀랍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원작을 본 적이 없는 어린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해졌다.

<브이>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처럼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 같다.

영화 <트랜스포머>가 더 충격적이지 않을까?(웃음)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역시 <2010 브이>처럼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드라마다. 누가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배신이 범람한다. <2010 브이>와 <스파르타쿠스>가 19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선정성이나 폭력성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에 회의적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1960년에 만들어진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했다지만, 검투사라는 설정 빼고는 모두 다르다. 이 드라마가 가까운 건 영화 <300>이다. 무엇보다 모든 남자의 몸매가 영화 <300>에 등장하는 이들의 몸매다.

액션은 <글래디에이터>와 비슷하다. <스파르타쿠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컴퓨터그래픽(CG)의 사용이다. 화면의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배경이나 장면이 시지다. 촬영 현장 영상을 보니까 배우들이 초록색 막 앞에서 연기하더라.

<튜더스> 역시 잔인하고 선정적이었지만, 사극의 성격을 살려 세트를 지어 그 안에서 촬영하고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렸다. <스파르타쿠스>는 이제 드라마를 찍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걸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컴퓨터 게임처럼 장면마다 일부러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했다는 티를 낸다. 그런데 이 시지가 3회 정도 보면 지겨워진다. 배경의 색깔 톤이나 피에 대해 무덤덤해지면서 집중도가 떨어진다.

폭력적인 시지 남용 지겹고 선정적 장면은 난데없어

시지를 이용해 만든 폭력적인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지나치게 피를 쏟고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이 반복되니까 무감각해진다. 생명경시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실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선정적인 장면은 참 난데없이 등장한다.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전혀 아니다. 이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게 놀랍다.

다 독신 인구인가?(웃음) <스파르타쿠스>는 수사 드라마이기도 하고, 정치 드라마이기도 하다. 스파르타쿠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은 정치 드라마인데, 도망간 사람들을 찾는 내용은 또 수사 드라마다. 로마 시대를 다룬 역사극이지만, 역사적인 부분보다 드라마의 극적 설정에 더 초점을 맞췄다.

드라마 <스파르타쿠스>와 1960년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인공의 태도다. 영화 속 스파르타쿠스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남과 싸우고 상대를 죽이지 본성이 잔인한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갈등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 스파르타쿠스는 잔인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인간사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 싶더라.

1960년과 2010년의 차이다. 예전에는 정의로운 성격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지금 드라마에 당시의 스파르타쿠스가 나왔다면 많은 이들이 답답하다고 했을 거다. 그런데 또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있어서는 지고지순하다. 남녀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욕망과 쾌락에 충실하지만, 이 둘만은 서로밖에 모른다. 사랑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얘기를 진행해간다.

이 드라마는 목숨 같은 사랑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싸우고 죽이는 단순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수 있다. 혼자만 고고하게 사랑을 지키는 스파르타쿠스는 <추노>의 대길이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제아무리 폭력적이고 잔인한 남자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순정만 지키면 멋진 남자 주인공이 된다. 순정만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드라마든 남자 주인공이 가져야 하는 필수 덕목인가 보다.

〈2010 브이〉와 〈1983 브이〉의 결정적 차이

“남녀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않다. 줄리엣과 도노반, 다이애나는 당시에 화제였다. 대단한 매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특히 도노반에게는 남자다움이 있었다. 맥가이버처럼 순박한 남성다움이 있었다. <2010 브이>의 주인공에게서는 그런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정석희)

“원작에서는 제목인 ‘브이’가, 저항군들이 빨간색 스프레이로 외계인들이 붙여놓은 포스터 위에 ‘브이’라고 쓴 ‘승리’라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브이’는 외계인에 승리할 거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2010 브이>에서는 ‘브이’가 외계인을 부르는 ‘비지터’(visitor)의 ‘브이’로, 외계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사실상 침략자인 그들을 초대해서 온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거다. 외계인의 침략에 대한 태도에서 두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 같다.”(차우진)

〈스파르타쿠스〉 이래서 2% 부족하다

“이 드라마는 다른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을 단발성 소재로만 사용한다. 자극만 있지 사건에 대해 생각할 여유나 의견을 가질 시간을 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동정하거나 ‘그래서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기도 전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그래서 결국 이 드라마 속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다 죽고 드라마가 끝날 것 같다.”(정석희)

“배우들이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인물이 훌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을 떼지 못할 만큼 빼어난 몸매를 가진 이들도 없다. 그래서인지 보면서 ‘와, 좋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지(CG) 남용도 2% 부족함에 일조한다.”(차우진)

정리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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