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국사책 대신 드라마를 통해 역사에 빠져드는 10대층
‘장희빈’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얼굴은? 윤여정이라면 1950~1960년대 전후세대나 산업역군 세대일 것이고, 이미숙이나 전인화의 얼굴이라면 1960~1970년대에 태어난 민주화 세대일 것이다. 정선경이나 김혜수로 장희빈을 기억한다면 1970~1980년대에 태어난 일명 ‘신세대’급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언급한 인물들이 장희빈을 연기했다니 믿을 수 없다’거나 ‘장희빈은 이소연뿐’이라는 반응을 나타낸다면, 1990년 이후에 태어난 ‘21세기 소년소녀’임이 틀림없다.
역사 속 인물들은 이렇게 그 역을 맡은 연기자의 얼굴로 남아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다.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손자인 어린 정조에게 왕의 덕목을 일갈하던 <이산> 속 영조의 죽음과, 미실을 견제했지만 결국 손자인 어린 진평왕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삶을 마감한 <선덕여왕> 속 진흥왕의 죽음이 교차한다. 영조와 진흥왕 모두 이순재라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순재라는 연기자를 디딤돌 삼아 우리는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도 남아 있지 않은 과거로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간다.
‘선덕여왕’ 10대 시청률 ‘파스타’보다 높아
역사와 엔터테인먼트 중간쯤 존재했던 사극이 최근 엔터테인먼트로 한발 더 가깝게 다가섰다. 왕 중심의 역사를 그대로 극화시켰던 전통사극과는 달리 2003년 <다모>를 기점으로 퓨전 사극은 왕이 아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말투나 행동 역시 현대극에 가깝게 바꿨다. <선덕여왕>과 <추노>로 이어졌던 지난해와 올해는 사극에서 또 한번의 전환기다. 절반은 현대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사극은 ‘현재’의 메시지를 담았고, 역사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과감하게 틀었다. 현대적 사극의 주 시청층인 30대 이상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사극에 관심이 없었던 10대까지도 주요 시청층으로 끌어들였다. 시청률 조사기관 에이지비(AGB)닐슨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10대 평균 시청률은 10.4%, <추노>의 10대 평균 시청률은 9.2%다. <선덕여왕>의 경우 1회 2.5%로 시작해 6개월 동안 최고 16%까지 오르며 상승곡선을 그렸다. 로맨틱 코미디인 <파스타>의 10대 평균 시청률 5%나 10대를 주요 시청층으로 한 <공부의 신>의 10대 평균 시청률 17%와 비교해도 놀라운 수치다.
“사극은 아빠만 좋아하던 드라마였어요. 내용도 복잡하고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무엇보다 지루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작년에 <선덕여왕>과 <추노>를 보면서 사극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게 됐어요. 요즘에는 <동이>도 자주 보고, 예전에 방영된 사극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관련 카페나 갤러리에도 가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해요. 말 그대로 역사를 드라마로 배우는 중이에요.” 역사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인 최재훈(16)군은 요즘 사극에, 그중에서도 정조에 빠졌다. 뒤늦게 <바람의 화원>과 <한성별곡>을 보면서 정조라는 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것. “역사 시간에 배울 때는 잘 몰랐는데, 드라마로 보니까 매력적인 인물로 느껴지더라구요. 드라마 갤러리에서 사진 올리고 인물에 대해 수다떠는 것도 즐기는 편이에요.” 10대나 20대가 사극과 관련해 주로 찾는 곳은 ‘디시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의 드라마 갤러리 등이다. 이곳에서 사극 출연진의 사진을 교환하고 ‘~하오’, ‘~하구려’ 등 사극에 나오는 말투를 흉내내면서 ‘사극 놀이’를 즐긴다.
3년 전부터 인터넷 세상을 떠도는 이미지 파일이 있다. ‘사극으로 보는 조선왕실 계보도’라는 제목의 이미지에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실을 거쳐간 27명의 왕을 중심으로 왕비와 후궁까지 계보도가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돼 있다. 등장인물이 100명에 육박하는 계보도가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이유는, 계보도가 <용의 눈물>, <왕과 나>, <장희빈>, <명성왕후> 등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사진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가 제작된 건 2007년. ‘희동’이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은 사극을 일일이 찾아 계보도를 만든 다음 10대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 게시판에 올렸다. 글에는 ‘대단하다’ ‘역사 공부를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등의 댓글이 수백개 달렸다. 이 계보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새로 나올 때마다 여러 누리꾼에 의해 업데이트된 버전이 만들어지고 있다. (커버스토리 이미지로 만든 계보도는 <추노>와 <동이>를 더한 ‘esc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이 계보도를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봐온 사극이 결국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역사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그 흐름을 만든 건 역사를 재료로 한 사극을 자기 방식대로 가지고 노는 젊은 세대다.
국사 수업시간에 ‘사극’ 활용하기도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한가지 방식으로서 사극은 꽤 효과적이다. 특히 국사책을 들고 졸고 있는 10대에게 사극은 더욱 효과적이다. 게다가 수험생 10명 중 한 명만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국사를 선택할 만큼 국사가 교육체계에서 제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요즘, 사극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환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서울 온곡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윤종배 교사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얘기를 다룬 <바람의 화원>을 수업 시간에 보여준 적이 있다. “실제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그 시대 사람들이 그림을 어떻게 즐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극을 활용한 거죠. 열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 시대를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지식을 보태면 아이들의 집중도가 높아져요.” 사극을 보고 그런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묻는 학생들도 있다. “사극에서 극적인 설정을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연출한 장면을 실제 역사로 믿게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를 딱딱한 것으로 치부하는 학생들에게 사극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뭐든 영상이나 이미지로 기억하는 젊은 세대에게 사극은 역사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다. 인조 시대는 들판 위를 뛰어다니는 ‘식스팩 근육’의 추노꾼들로 기억되고, 첨성대에 가면 큰 꿈을 꾸었던 선덕여왕의 눈빛이 까만 하늘의 별처럼 떠오른다. <추노>나 <동이>가 없었다면, 천민의 삶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어떠한가, 사극으로 배운 역사도 꽤 쓸모있지 아니한가.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표지디자인 이정희 기
자 bbool@hani.co.kr
난, 사극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국사 수업시간에 ‘사극’ 활용하기도 역사에 대해 얘기하는 한가지 방식으로서 사극은 꽤 효과적이다. 특히 국사책을 들고 졸고 있는 10대에게 사극은 더욱 효과적이다. 게다가 수험생 10명 중 한 명만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국사를 선택할 만큼 국사가 교육체계에서 제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요즘, 사극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나마 환기시키는 구실을 한다. 서울 온곡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윤종배 교사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얘기를 다룬 <바람의 화원>을 수업 시간에 보여준 적이 있다. “실제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그 시대 사람들이 그림을 어떻게 즐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극을 활용한 거죠. 열 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 시대를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지식을 보태면 아이들의 집중도가 높아져요.” 사극을 보고 그런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묻는 학생들도 있다. “사극에서 극적인 설정을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연출한 장면을 실제 역사로 믿게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를 딱딱한 것으로 치부하는 학생들에게 사극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뭐든 영상이나 이미지로 기억하는 젊은 세대에게 사극은 역사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다. 인조 시대는 들판 위를 뛰어다니는 ‘식스팩 근육’의 추노꾼들로 기억되고, 첨성대에 가면 큰 꿈을 꾸었던 선덕여왕의 눈빛이 까만 하늘의 별처럼 떠오른다. <추노>나 <동이>가 없었다면, 천민의 삶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어떠한가, 사극으로 배운 역사도 꽤 쓸모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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