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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교는 도쿄의 점심시간이었다

등록 2010-03-03 20:53수정 2010-03-07 10:29

김태훈 사장이 도쿄에서 만들어 판 불고기 도시락. 그는 정통의 맛으로 승부했다.
김태훈 사장이 도쿄에서 만들어 판 불고기 도시락. 그는 정통의 맛으로 승부했다.
[매거진 esc]
‘불고기 트럭’ 한대 달랑 몰고 일본의 음식문화를 1년간 엿본 고깃집 사장 김태훈씨
이불 바깥으로 손만 내밀어 그는 자명종을 껐다. 7시30분. 샤워를 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커다란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전날 양념장에 재어 둔 불고기를 살펴봤다. 달력에는 2009년 6월15일이라고 돼 있었다. 석 달째 맞는 똑같은 아침이지만, 여전히 벌떡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손을 씻고 전기밥솥의 전원을 켰다. 50인분의 쌀밥을 지을 수 있는 솥이다. 오전 10시. 2인 탑승 소형 트럭의 운전석을 열었다. 겨우 6월 중순인데, 운전석은 햇볕으로 뜨겁게 달궈져 있다. 잠시 운전석 문을 열고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트럭 화물칸의 휘장을 걷어올리고 오늘 사용할 ‘무기’를 점검했다. 젓가락 70여개, 간이 도시락통 60여개, 작은 비닐백 60여개.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손을 씻었다. 밥, 양념장에 잰 불고기가 담긴 통을 하나씩 화물칸에 실었다.

순식간에 몰려왔다 사라지던 그 신비로운 60분
김태훈씨
김태훈씨

시동을 켜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석 달째지만,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게 딱 하나 있다. 한국과 차로 운영이 정반대다. 앞으로 가야 할 때 왼쪽 차로인지 오른쪽 차로인지 여전히 헷갈렸다. 20여분 차를 몰자 익숙한 거리의 빌딩이 보였다. 손목시계는 10시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두 번째로 일찍 도착했다. 인도인과 그가 몰고 온 미니 트럭이 일등이다. 석 달째 보는 얼굴이다.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십층 건물 앞 주차장에 트럭을 세웠다. 주차비는 한 시간에 300엔. 그는 트럭 화물칸의 휘장을 걷고, 발전기를 켜고, 가스레인지를 점검하고 불판을 올려놓고 ‘정통 한국식 불고기 650엔’이라는 작은 간판을 수건으로 닦았다. 높은 건물만 있고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12시가 되자 거리는 갑자기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정장을 입은 남녀 직원들이 단 5분 만에 거리를 메웠다. 그의 트럭 앞에도 사람들이 벌써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를 도와야 할 친구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게 시계를 봤다. 친구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손님들이 들이닥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친구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랏샤이마세! 나니니 나사이마스카?(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친구 히시키 신고가 건네주는 주문 쪽지를 하나하나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불고기를 익혔다. 손님들은 훈김이 나는 한국식 불고기 도시락을 받아들고 근처 공원 벤치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밥을 먹었다.

정확히 오후 1시5분에 도쿄 미나토구 시나가와역 근처 소니 본사 앞 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마치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마술피리로 직장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버린 것처럼. 김태훈(35·오른쪽 사진)씨는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했다. 그가 지난해 3월 초부터 지난 2월18일 입국하기 전까지 매일 도쿄에서 겪은 아침 풍경이다.

도쿄의 한 음식점 거리.
도쿄의 한 음식점 거리.

김씨는 서울 강남에서 고깃집 ‘압구정 화로구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 직장인들을 상대로 점심을 파는 모험에 나선 건 돈 때문이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전통 음식, 다양한 음식 문화를 접해보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일본인 친구들도 많았다. 음식 관련 사업을 하는 어릴 적 친구의 영향도 컸다.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일본인, 특히 일본 직장인들의 입맛이 어떤지 체득한다는 것, 둘째 다양한 일본의 음식 문화를 접하고 즐기자는 것.

트럭만 있으면 노점 허가… 위생조건은 엄격

지난해 1월 본격적으로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일본인 친구로부터 정보를 들었다. 소니 본사 앞에 적지 않은 일본 젊은이들이 트럭에서 점심 장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찾아간 점심 풍경은 재밌었다. 직장인들은 딱 한 시간 나왔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본 젊은이는 물론 인도인, 필리핀인 등 외국인들도 자기 나라 음식을 도시락으로 팔고 있었다. 김씨는 주저 없이 3월 일본에 들어가 65만엔에 중고 트럭을 구입했다. 일본 식당계의 유통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에서 음료 제품을 받아 일본에서 팔 목적으로 작은 유통회사도 차렸다.

“우리나라에선 분식 포장마차, 이런 게 다 불법이잖아요? 일본은 재밌는 게 트럭만 있으면 노점에서 합법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허가증이 나와요. 대신 기준이 엄격해요. 위생 점검도 받아야 하고 음식 메뉴 하나당 40ℓ의 식수를 구비해야 하죠. 40ℓ 물탱크가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하죠. 또 트럭이나 주변 물품이 타지 않는 재질로 돼 있어야 하고요. 그런 조건을 만족시키면 구청에서 허가증이 나옵니다. 저 같은 경우 비빔밥 도시락, 불고기 도시락 등 메뉴가 두 개라 구청에서 허가를 받으려면 80ℓ 탱크가 필요했죠. 어떤 일본 젊은이들은 트럭 말고 30년 전 폴크스바겐을 개조해서 의자 떼고 개조해서 커피를 팔기도 하죠. 물론 그 젊은이들도 물탱크와 구청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갖춰야죠.”

강남에 있는 그의 식당 근처 커피숍에서 김씨는 일본의 앞선 행정에 대해 설명했다. 소니 본사 앞에는 김씨 외에도 하루 평균 14~15대의 도시락 트럭이 와서 장사했다. 장사를 마치고 서로 남은 도시락은 바꿔서 먹기도 했다. 소니 본사 앞은 작은 ‘세계 광장’이었다. 김씨의 승부수는 ‘정통’과 ‘즉석’이었다. 일본인 입맛에 맞추지 않았다. 불고기 양념은 물론 김치도 한국식이었다. 음식 맛에 대한 설문지를 돌리다 한 일본인 고객이 “김치가 너무 시고 맵다”고 냉정하게 지적한 적도 있다. 김씨는 그 뒤 매운 김치와 일본인 입맛에 맞는 덜 매운 김치를 따로 준비했다. 한류를 타고, 빌딩 근처 편의점에도 불고기 도시락이 있었다. 그러나 맛은 800엔이라는 비싼 가격에 못 미쳤다. 미리 만든 불고기는 육즙이 없었다. 김씨는 주문받은 순간 불고기를 익혔다.

김태훈 사장의 비빔밥 도시락. 김태훈 제공
김태훈 사장의 비빔밥 도시락. 김태훈 제공

영업은 대성공이었다. 김씨는 하루 평균 50개 안팎의 도시락을 팔았다. 혼자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하나에 650엔. 주변엔 소니 본사와 고급 사무실촌답게 비싼 레스토랑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한 끼에 1000엔을 쓸 직장인은 많지 않았다. 본사의 사원식당에 질린 소니 본사 직원들은 빌딩 앞에 펼쳐진 ‘세계 음식 페스티벌’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김씨는 원하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영업은 한 시간만 하고, 주말엔 다양한 일본 음식, 세계 음식을 맛보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가끔 동포 손님이 와서 “프랜차이즈를 해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유통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사히맥주 회장이 포장해 간 떡볶이

“지난해 10월 도쿄 우에노역 근처 아사히 본사에서 맥주 페스티벌을 했습니다. 구청에서 음식을 팔고자 하는 트럭 노점상의 참가 신청을 받더군요. 저도 허가증을 받았습니다. 트럭 노점은 안주와 맥주 외에 주류 한 가지만 팔 수 있습니다. 전 한국식의 아주 매운 떡볶이와 막걸리를 팔았죠. 웬걸, 일본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떡볶이를 다 드시더군요. 축제 기간 중에 한 나이 지긋한 중년 신사가 오시더니 떡볶이를 포장해서 가져가시더군요. 몇분 뒤에 한 손님이 와서 ‘저분이 아사히 본사 회장이시다’라고 하더군요. 하하.” 그는 혈혈단신 건너가 도쿄 직장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왔다. 그는 음식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인생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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