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사회적 약자들 담아온 다큐멘터리 작가 한금선…
피사체와의 거리 통해 다른 각도의 진실 보여줘
사회적 약자들 담아온 다큐멘터리 작가 한금선…
피사체와의 거리 통해 다른 각도의 진실 보여줘
한·금·선. 하늘하늘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단발머리 날릴 것 같은 이름. 외진 어촌 한 비루한 술집에서 아비의 막걸리 심부름을 다닐 것 같은 이름. 마음에 품은 청년을 만나도 혼자 속앓이하면서 수줍어할 것 같은 이름. 사진가 한·금·선. 세 글자가 가슴에 전해주는 스산한 짐작들이다.
“다 찍으면 속절없이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실을 들어서는 순간 이 모든 아련한 감정들은 한순간 ‘펑’ 하고 사라진다. 아프리카 밀림 같다. 그는 그곳의 ‘포스’ 강한 족장이다. 여기저기 사진집이 하이에나처럼 발톱을 세우고 있고 컴퓨터 화면에는 낯선 흑백의 사진들이 사냥하는 원주민처럼 튀어나오려고 한다. 부족의 문양이 박힌 의자는 ‘휘’ 바람소리 내면서 뒹군다. “멋지죠, 아프리카 말리에 갔을 때 산 거예요. 나무를 통으로 깎아서 만든 거죠.” 한금선(44)씨가 건네주는 짙은 밤색의자와 목각 인형에서는 ‘우우~우우’ 아프리카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인도의 한 부족장이 준 납작의자도 보여준다.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말도 안 통하는 인도 아이들을 앉혀놓고 한국말로 <콩쥐 팥쥐>를 들려줬어요. 신기하게도 알아듣는 것처럼 웃고 울고 하더라구요. 아이들 잘 봐주었다고 받았죠.” 그는 정말 용감하다. 낯선 어느 곳에서도 꿋꿋하다. 세상에 두려움 없는 사진가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는 존재감이 단단한 작가로 사진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각종 그룹전이나 큰 사진프로젝트에 초청되었고 한국에서 연 첫 전시 <집시, 바람새 바람꽃>의 사진들은 지금까지 30여점 팔렸다. 여자라서 돋보인 것이 아니다. 사진에 대한 끈적끈적한 고집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 피사체에 집착한 결과다. 그 피사체는 사람이다. 사람들도 그냥 사람들이 아니다. 어둡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약자라는 말조차 붙이기 미안한 사람들이다. 판자촌에 사는 이들, 홀몸노인, 지적장애인들, 이스라엘 폭격을 받은 레바논 사람들, 농부들, 집시들, 매춘부, 앵벌이 아이들 등. “처음에는 너무 진부한 거 아니냐! 소리 많이 들었어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죠. 이런 사진들 실제 많이 본 적 있나?” 그는 말을 잇는다. “우리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요, 실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죠.” 그의 이런 사진작업의 정체성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면서 완성되었다. 2003년 홀몸노인을 찍은 <눈 밖에 나다>, 2005년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등의 사진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격월간 <인권>에서도 프리랜서로 일했다. 그는 인권위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 사회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얻었고 더 많은 고민을 했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방식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작업과 다르다. 피사체와 하나가 되어 그 속에서 진실을 담으려는 방식이 아니다. “장비는 가득 들고 가서, 제가 사진 찍습니다라고 확실히 알리죠. ‘다 찍으면 속절없이 사라질 겁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 온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죠.” 차갑다. 하지만 차가운 것이 뜨거워지면 그것처럼 센 화력도 없다. 최근에 연 전시 <꽃 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는 전라남도 무안군 ‘애중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성산정신요양원을 찍은 사진들이다. 이 작업의 시작은 프랑스 여자감옥을 찍은 ‘제인 에블린 아트우드’의 사진부터다. “프랑스에서 그 사람의 전시를 봤어요. 별을 관측하는 곳에서 전시했는데 죄수들이 마치 그 장소에서 한을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감옥에서 세상으로 나들이 나온 것 같았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에블린처럼 요양원에 있는 이들에게 세상 나들이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 사진작업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햇살 아래 계신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워 셔터를 누를 수 없었던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학습된 친절이 사라진 후 내 앞에서 발가벗기도 하고 사진가가 혹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안 찍으려는 노력이 힘들었어요”라고 말한다. 극적인 사진이 나올 만한 상황이 기쁘지 않다. 이런 단편적 모습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삶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정의 내리지 못한다는 점), 오히려 그런 단편이 편견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피사체와 감정의 거리감을 줄 수 있는 망원렌즈만 사용했고, 때로 그들이 자신을 의식하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함께 춤추고 놀기도 했다. 2년 반 동안 찍은 이 사진들은 지금 그 요양원 강당에 걸려 있다.
그는 이렇게 단단해 보이지만 10년간 ‘방황하는 별’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장, 총학생회장 대행을 지낸 ‘열혈 학생’이었다. “사회단체로 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폐해져갔다. 인생의 목표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시나리오작가, 집체극 연출자, 편집디자이너, 남대문시장 매점 아르바이트 등. 갑자기 사진이 그의 인생에 뛰어들어왔다. “집체극에서 사진슬라이드를 하는 거예요. 그것이 계기였죠.”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다. 대학 때 함께했던 동료들의 외침이 있는 거리로 가서 셔터를 눌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진가로 살 줄 몰랐던 시절이다. “잡지 <노동운동>에서 한 사진을 봤어요.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찍은 사진인데 숨이 막혔어요. 노동자가 이 우주의 주인공 같아 보였어요. 예전에 수천번 얘기했던 어떤 논쟁보다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더라구요.”
‘세이브더칠드런’에서 무료촬영 기부
그는 3년 뒤 프랑스 이카르 사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을 오랫동안 찍기 위해서 한 선택이었다. “학비가 적고 들어가기 쉬운 점”도 한몫을 했다. “사진이 내 인생을 얼마만큼 흔드는지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씨는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찍을 수 있고 무엇을 찍을 수 없는지도 배웠다. 사진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는 방법도 찾았다.
그는 요즘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아동권리 보호와 아동학대 예방 치료활동을 벌이는 사회복지법인)에서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대신 기부금 영수증을 받는다. 그는 끊임없이 사진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작품사진 한금선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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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한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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