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차는 항상 뜨겁게 마신다는 편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유자청 주머니는 옛 해남의 부잣집에서 겨우내 먹던 디저트다. 얼음과 함께 떠먹은 맛은 일품이었다.
[매거진 esc] 한식 계량화하는 요리연구가 박종숙씨가 전승하는 21세기형 슬로푸드 유자청
겨울만 되면 평소보다 더 자주 레게를 듣는다는 한 가수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레게는 중남미의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음악이다. ‘짝쿵짝쿵’ 끈적하면서 경쾌한 리듬감이 북위 37도 서울의 찬 바람을 그나마 견디게 해준다고 그 가수는 썼다. 추울수록 따뜻한 남쪽 나라가 생각나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유자차를 레게음악 같은 차라고 비유하면 어떨까. 유자는 중국 양쯔강 유역이 원산지이며 한국에서는 전라남도 장흥·진도와 경상남도 남해·통영 등이 주산지다. 겨울에 생각나고 감기에 걸리면 더 그리워지는 유자차는 레게음악 같은 차다. 그러나 젊거나 어리다면 이 비유법이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유자의 겉모습은 울퉁불퉁하다. ‘유자차를 마신다’는 말에서 젊은이들은 ‘요즘’이라는 단어보다 ‘옛날’을 떠올릴지 모른다.
유행에도 트위터에도 눈 밝은 전통음식 연구자
요리연구가 박종숙씨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곧장 한 시간 동안 그의 열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 열변 뒤에 그는 냉장고에서 유자청 주머니를 꺼내 맛보라고 할 게다. 해남의 부잣집에서 겨울 디저트로 즐겼다는 유자청 주머니 말이다. 지난 7일 오후 4시 논현역에 내렸다. 논현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빌딩의 24시간 편의점 옆에 그가 운영하는 ‘박종숙 손맛작업실’이 있다. 특별 수강생 2명이 유자청 주머니 만들기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앉자마자 기자에게 차 한잔을 건넸다. 레몬 조각 모양의 유자 한 조각이 있었는데, 얼음이 송송 떠 있었다. 차가운 유자차라. 그는 유자차 말고 한식의 계량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은 계량화할 수 없고 표준화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바가지라도 계량화해야지. 그래야 다음에 더 맛있게 할 수 있어. 나처럼 가르치는 사람은 철저히 계량하지 않으면 그게 연구가 아니잖아요?…(중략)…예를 들어 내가 된장에 올인한 지 20여년 됐어요. 가령 ‘메주가 한 말이면 물은 서너 배 넣고, 소금물 만들 땐 소금물에 달걀을 띄웠을 때 물 위로 올라온 부분이 100원짜리 동전이나 500원짜리 동전 크기면 된다’는 식이 지금 장 담그기 현실이에요. 그렇다고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좋은 교육법은 아닌 거예요.”
받아 적을 새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메주가 물기 없이 완전히 말랐을 때 무게를 정확히 킬로그램으로 수치화해 설명했다. 메주 담그기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비유법을 택한다. ‘메주에 작대기를 꽂아서 넘어가지 않으면 (메주가) 맛있다’는 식이다. 그는 와 닿기 쉬운 이런 설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물과 메주의 비율을 조금 더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장을 담그는 항아리의 크기가 클수록 메주와 물의 배율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를 근대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터뷰 중간에도 쉴 새 없이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다. 유자 껍질을 좀더 효율적으로 벗기기 위해 서양 요리 도구를 쓰는 데도 주저 없다. 레몬 껍질을 벗긴 레몬 제스트를 만들 때 쓰는 레몬 채칼로 유자 껍질을 아주 얇게 벗겼다. 인터뷰 도중에도 트위터를 연방 확인했다. 57년생인 그는 생물학적 나이보다 젊었다.
작업실은 ㅁ자의 단순한 구조였다. ㅁ자의 방 한가운데 ㅁ자의 주방과 탁자가 있다. 바로 옆 작업대 위에는 속을 파내고 씻은 유자 껍질이 담긴 통이 있다. 또 한쪽엔 미리 썰어 놓은 대추 채, 밤 채 등이 있다. 수강생 2명은 유자 껍질 안에 속을 채운 뒤 음식용 면실로 유자를 묶었다. 그래서 유자청 주머니다. 10여년 전 원로 요리연구가 강인희 선생에게서 배운 유자청을 박종숙씨는 유자청 주머니라고 명명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수강생에게 끈 묶기 시범을 보였다. “그럼 강인희 선생이 전수하신 유자청을 개량하신 건가요? 조리법을 조금 바꾸셨습니까?” “아니에요, 개량이 아니고 계량을 했다는 말이지. 예전엔 ‘밤 ○○개 대추 ○○개’라는 식이었는데 나는 계량을 했지.” “유자청과 어울리는 디저트나 떡이 있나요?” “아니 그 자체로 즐기면 돼요. 그 자체로 헤비한 거지.”
한 근대주의자가 계량화하고 과학화해 전수하는 유자청은 어떤 맛일까? 얼음과 함께 8분의 1조각의 유자청 속을 티스푼으로 덜어 먹었다. 첫맛은 상큼한 단맛이 났고 찻물을 목으로 넘기자 약간 쌉쌀한 맛이 끝에 감돌았다. 여기에 대추와 밤 채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졌다. 맛이 깊었고 풍미가 복잡했다. 머릿속에서 ‘좋은 전통의 맛’이라는 표현이 맴돌았다.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이탈리아에서 생긴 슬로푸드 운동의 사업 중에 ‘맛의 방주’(taste of ark)가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 음식의 맛과 조리법을 보존하는 사업이다. 유자청 주머니는 방주에 들어가기보다 세상이 맛보면 좋을 겨울 디저트다. 박씨는 유자청은 물론 여러 한식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슬로푸드 본부는 자신들의 철학을 알리기 위해 이탈리아에 미식과학대학을 만들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남양주시 슬로푸드팀 노민영씨도 최근 유자청 주머니를 맛봤다. 그는 “유자청 주머니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사람들이 잊고 있던 음식인데 이를 발굴, 복원한 것이 슬로푸드 운동의 철학과 잘 맞습니다. 이 음식은 오래전부터 유자라는 종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흔적과, 유자가 자랄 수 있는 해남의 기후적 특색을 반영하는 음식이네요. 여러 가지 식감을 한번에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라고 평했다. 박종숙 손맛작업실 서가에 <슬로라이프>(쓰지 신이치)가 꽂혀 있던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상큼한 첫맛, 쌉쌀한 끝맛 슬로푸드라는 게 돈 많은 사람들 유기농 먹으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냉소주의자들도 박종숙 손맛작업실 홈페이지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1000원 가지고 열 사람이 먹을 10개의 사과(를 사기)보다는 1000원에 한개짜리 사과를 사서 열 사람과 나누어 먹으라던 (아버지) 말씀에 들어 있는 메시지로 인생의 모든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패스트푸드를 파는 24시간 편의점과 같은 건물에서 전통의 맛이 전수되고 있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해남 부잣집 겨울 디저트의 변신
한 근대주의자가 계량화하고 과학화해 전수하는 유자청은 어떤 맛일까? 얼음과 함께 8분의 1조각의 유자청 속을 티스푼으로 덜어 먹었다. 첫맛은 상큼한 단맛이 났고 찻물을 목으로 넘기자 약간 쌉쌀한 맛이 끝에 감돌았다. 여기에 대추와 밤 채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졌다. 맛이 깊었고 풍미가 복잡했다. 머릿속에서 ‘좋은 전통의 맛’이라는 표현이 맴돌았다.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이탈리아에서 생긴 슬로푸드 운동의 사업 중에 ‘맛의 방주’(taste of ark)가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 음식의 맛과 조리법을 보존하는 사업이다. 유자청 주머니는 방주에 들어가기보다 세상이 맛보면 좋을 겨울 디저트다. 박씨는 유자청은 물론 여러 한식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슬로푸드 본부는 자신들의 철학을 알리기 위해 이탈리아에 미식과학대학을 만들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남양주시 슬로푸드팀 노민영씨도 최근 유자청 주머니를 맛봤다. 그는 “유자청 주머니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사람들이 잊고 있던 음식인데 이를 발굴, 복원한 것이 슬로푸드 운동의 철학과 잘 맞습니다. 이 음식은 오래전부터 유자라는 종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흔적과, 유자가 자랄 수 있는 해남의 기후적 특색을 반영하는 음식이네요. 여러 가지 식감을 한번에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라고 평했다. 박종숙 손맛작업실 서가에 <슬로라이프>(쓰지 신이치)가 꽂혀 있던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상큼한 첫맛, 쌉쌀한 끝맛 슬로푸드라는 게 돈 많은 사람들 유기농 먹으라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냉소주의자들도 박종숙 손맛작업실 홈페이지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하지 않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1000원 가지고 열 사람이 먹을 10개의 사과(를 사기)보다는 1000원에 한개짜리 사과를 사서 열 사람과 나누어 먹으라던 (아버지) 말씀에 들어 있는 메시지로 인생의 모든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패스트푸드를 파는 24시간 편의점과 같은 건물에서 전통의 맛이 전수되고 있었다.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