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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물결, 촌스러워 못 보겠어

등록 2009-12-30 18:26

너 어제 그거 봤어?
너 어제 그거 봤어?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갱년기도 아닌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오그라든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올해에는 ‘유혹 시리즈’ 막장 드라마부터 공익과 감동을 강요하는 예능 프로그램, 아이돌로 도배한 프로그램 등을 보면서 이런 증상을 꽤 여러 번 경험했다. 올해 방송은 다른 해에 비해 퇴행의 조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다른 문화장르에 비해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도 못했다.

칼럼의 필자를 바꾸는 송년 특집을 맞아 ‘너 어제 그거 봤어’는 ‘모어 댄 워즈’ 연재를 마친 조진국 작가(사진 왼쪽)와 ‘투쓰리 풀카운트’를 연재중인 조민준 객원기자와 함께 진행했다. 2007년부터 1년 이상 이 코너를 해왔던 조 작가와, 역시 몇 번에 걸쳐 이 코너에서 만났던 조 객원기자는 특집을 위해 ‘조조 브러더스’(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이름이 비슷하다)를 긴급 결성해, “티브이, 촌스러워서 못 보겠다”를 주제로 조금은 거친 입담으로 올 한해를 정리했다.

성취에 대한 경배 넘치는 2009 예능 프로그램
그 밥에 그 나물 ‘연예대상’ 재방송 보는 줄 알았어

조진국(이하 국) 대담에 오기 전에 30대와 50대인 남성들과 커피를 마셨다. 셋이 앉아 ‘티브이 드라마가 너무 재미없어서 점점 안 보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3회까지만 보면 결말을 알 수 있을 만큼 뻔한 얘기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요즘 드라마는 같은 이야기를 제목만 바꿔서 한다. 또 임성한이나 문영남 등 썼던 작가들만 계속 작품을 한다. 자극적인 것에도 이미 무뎌졌다.

조민준(이하 준) 올해 유독 재미가 없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 장르물도 있었고, 미드나 일드 같은 드라마를 표방한 드라마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시청률 20%를 넘기지 못했다. 결국 그 가능성이 이어지지 못하고, 하던 얘기를 반복하게 된 거다. 그 퇴행의 극단이 <아내의 유혹>과 <천사의 유혹>으로 이어지는 ‘유혹 시리즈’였다.

올해 상반기 막장 드라마 신드롬을 일으킨 <아내의 유혹>(위)과 ‘루저’논란을 만들어 낸 <미녀들의 수다>. 에스비에스·한국방송 제공
올해 상반기 막장 드라마 신드롬을 일으킨 <아내의 유혹>(위)과 ‘루저’논란을 만들어 낸 <미녀들의 수다>. 에스비에스·한국방송 제공
김병만 대상 줬으면 손뼉 쳤을 텐데

초반에는 <아내의 유혹>을 재미있게 봤다. 속도감 있는 전개는 칭찬받을 만하다. 문제는 모든 게 우연으로 이뤄진다는 거다. 우연은 드라마에서 가장 마지막에 써야 하는 장치다. 우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쓸 때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놓고 너무 쉽게 풀어낸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최근 드라마는 기획은 정해져 있고 거기에 맞춰 글을 쓸 사람만 찾는다. 그러다 보니 작가들이 소모품처럼 이용된다. 결국 이중의 벽에 갇힌 느낌이다.

요즘 드라마가 가장 퇴행적이라고 느끼는 건 선과 악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악역을 점점 극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천인공노할 인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상식 밖의 악역을 만들어낸다.

생각 없이 종잇장처럼 얇은 악역을 내세우는 드라마들이 많다. 그런 드라마와 비교해 <선덕여왕>의 미실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악역인지 새삼 생각하게 한다.

막장 드라마는 공갈빵 같다.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고, 먹어도 여전히 배고프다. <꽃보다 남자>는 겉으로는 예쁜 꽃미남이었지만 사실 속은 낡은 얘기였다.

내용은 분명히 아침드라마인데 하이틴물을 표방했다는 게 문제다. <내조의 여왕>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간접광고(PPL)를 가장 훌륭하게 썼다는 거다. 상품을 작품 속에 녹여서 쓰면 아무리 상품이 자주 나와도 참고 볼 수 있다.

간접광고는 모자란 제작비 때문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점점 노골적인 간접광고가 많아지면서 이제는 제작진이나 시청자나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 정도라는 거다. 아예 시장을 열어주든지, 아니면 아예 엄격하게 규제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했으면 좋겠다.

드라마라고 다 같은 ‘드라마’가 아니다. 이제 시간대별로 다른 성격을 가진 드라마를 편성해야 하지 않을까. <수상한 삼형제>와 <선덕여왕>이 같은 ‘드라마’ 장르로 묶이는 건 문제가 있다. 아침드라마나 일일드라마는 그 시간대에서 가장 선호하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대신 미니시리즈 같은 시간대에는 조금 더 새롭고 미니시리즈에 맞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로 특화했으면 좋겠다.

지난주 토요일에 한국방송 <연예대상>을 보는데 재미가 없더라. 또 강호동 아니면 유재석이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방송 3사의 대상 후보가 다 같다.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

대상 후보를 보면서 김병만에게 상을 주면 정말 훌륭할 거라고 생각했고, 이경규라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강호동이 받더라. 아무리 효자 프로그램 진행자라고 해도 2년 연속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연예대상은 긴장감이 떨어진 지 오래다. 강호동과 유재석이 아닌 새로운 강자들이 나와야 한다. 김제동이나 신동엽처럼 말로 풀어내는 재미를 주는 이의 코미디도 보고 싶은데 최근 예능에는 다양성이 없다.

예능 프로그램에 감동을 넣으려는 게 최근 좀 심해지지 않았나. 한국방송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전반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감동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게 보인다. <1박2일>도, <남자의 자격>도 어떤 성취를 통한 감동을 주려고 한다. <무한도전>을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 가급적이면 그런 감정을 배제한다는 거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예능에 감동이 필수라는 인식이 뿌리내리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오빠들의 사랑 ‘브아걸’

예능 프로그램은 쉬기 위해서 보는 건데, 요즘 예능은 점점 더 부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티브이가 감동과 공익, 서로 돕기와 나눔만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순수하게 오락만 즐기는 프로그램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출발! 드림팀 시즌2>를 보더라도 예전과는 달리 마지막에 꼭 성취감에 대한 경배 같은 것을 넣는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

문화방송 <일밤>은 개편을 하면서 이미 패턴화가 되어버린 감동 코드를 또 넣었더라.

예전에 김영희 피디가 했던 <일밤>이 예능에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시도였다면, 지금 김 피디가 만드는 <일밤>은 이미 예능 텃밭 자체가 감동인데 거기에 쐐기를 박는 식이다. 과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감동과 공익이 예능에서 꼭 필요한 요소로 인식되는 것은 ‘루저’ 사건이나 <무한도전>에서 정준하가 짜증을 낸 것에 대해 시청자가 격한 항의를 했던 사건 등과 연결된다. 예능을 단순히 쇼라고 보지 않는다는 거다.

<무한도전> 정준하 사건의 경우 리얼버라이어티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다가 출연자가 갑자기 짜증 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게 캐릭터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루저’ 사건도 그랬다. 그걸 보면서 그냥 예능 프로그램에서 저런 얘기를 했구나 하고 넘기기 어렵다. 그건 시청자의 잘못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이 재미있는 얘기 대신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를 다 얘기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만약 <라디오 스타>처럼 순수하게 웃고 떠드는 프로그램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다면 아마 화제가 되지 않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미녀들의 수다>는 교양 토크쇼를 표방하면서 사회적인 얘기를 많이 한다. 예능 프로그램이 점점 공익 등의 가치를 강조하다 보니 사람들의 인식 역시 달라지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하는 말을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 거다.

올해 아이돌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면서 걸그룹뿐 아니라 보이그룹까지도 노골적으로 성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처음에는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아이돌 그룹이 쏟아지면서 몇명 빼고는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겠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운아이드걸스’가 좋다.(웃음)

나도 브아걸과 카라가 좋다.(웃음) 거대한 기획상품이라는 느낌을 주는 그룹보다 자력으로 열심히 올라오는 것 같은 그룹에게 정이 간다.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다른 팀들과는 달리 그런 점을 가리면서 차별성을 보여준 투애니원도 좋다. 애프터스쿨은 너무 유이만 믿고 가는 것 같다.

유이 말고도 괜찮은 멤버들이 많던데, 다른 멤버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더라.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일본 걸그룹 모닝구무스메의 오랜 팬이다.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너무 피곤한 상태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그 순간 신기하게 피로가 싹 풀렸다. 우리나라에서 음악성이 뚜렷한 음악이 성공하지 못하는 건 결국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가 아닐까.(웃음) 매일 너무 피곤하게 사는 나라에서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듣지 않느냐고 대중을 탓하는 건 옳지 못하다. 프로그램을 용기 있게 기획하는 게 먼저다.

다양성 대신 아이돌에 ‘몰빵’하는 케이블 음악 프로그램들

아이돌 그룹이 버라이어티를 모두 장악했다.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 말고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걸 찾아서 들을 틈을 주지 않는다. <음악여행 라라라>나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있어서 다행이다. 지겨울 정도로 아이돌만 반복되다 보니 거꾸로 이런 프로그램을 찾아보게 된다. 케이블방송에서는 이렇게 좋은 기획을 모험을 해서라도 해 볼 만하지 않나.

처음 케이블 음악채널이 나왔을 때에는 음악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풀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존이 더 시급한 건 그쪽이었다. 결국 지상파보다 더 극단적인 상업성으로 가고 있다. 아이돌 그룹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만 해도 몇 개인지 모르겠다. 결국 그나마 여유가 있는 공중파에서 <음악여행 라라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 올해 가장 어이없었던 장면

“<아내의 유혹>에서 양은냄비로 사람을 때려서 기절을 시킨 장면. 양은냄비로 맞으면 보통 그렇게 기절하지는 않는다. 그 장면이 올해 막장 드라마의 경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면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조민준)

“<미녀들의 수다>의 루저 발언. 그때 다른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미국에 있었는데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보고 무척이나 화가 났었다. 그리고 밤새 울었다.(웃음)”(조진국)

● 내년에 이것만은 말아줘

“내년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 후보군이 유재석-강호동 2강이 아니라 적어도 4강 정도는 됐으면 좋겠다. 몇년째 반복되는 2강 체제를 보는 게 지친다.”(조진국)

“웃자고 보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는 장면은 안 봤으면 좋겠다. 공익과 감동을 예능에서 봐야 하는 건 너무 힘들다.”(조민준)

정리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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