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린의 해삼요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고려해 소화가 잘되도록 담백한 소스로 만들었다.
[매거진 esc]
미식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단골 음식점 주방장 회고 …
“건강 나빠졌을 땐 짱뚱어탕 보내드려”
미식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단골 음식점 주방장 회고 …
“건강 나빠졌을 땐 짱뚱어탕 보내드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 탕자쉬안 전 중국 국무위원, 고노 요헤이 전 일본 중의원 의장,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글레프 이바셴초프 주한 러시아 대사 ….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에 참석한 여러 나라 조문단 명단이다. 이들 외에 평범한 시민들이 꽃을 바치고 묵념했지만, 기자들의 펜과 카메라는 이들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중산층 등 보통 사람들이 주인인 세상을 지향했음을 떠올린다면 이는 좀 불공정한 일이다.
는 보통 사람들이 가진 김 전 대통령의 기억 가운데 두 개를 길어올렸다. 걸출한 정치인에게 연설하고, 원고를 쓰고, 분노하고, 사랑할 에너지를 주었던 보통 사람들이다. 중국음식점 ‘홍린’의 장병화 주방장과 남도음식 전문점 ‘포도나무집’의 이화숙씨가 그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취임 전후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그들의 기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종종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비교된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간소한 옥수수 음식에서 말년에 모잠비크식 해산물요리까지 가리지 않고 음식을 즐겼으며, 특히 치킨 커리 등 닭요리를 좋아했다고 <가디언>은 썼다. 김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음식으로 대부분 ‘홍어’를 떠올리지만, 그는 실제로 만델라처럼 가리지 않고 모든 음식을 잘 먹었다. 특히 중국 음식은 그의 숨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기름기 대신 담백한 음식 선호
홍린 장병화(55) 주방장이 기억하는 디제이
“저는 1981년부터 2001년까지 마포구 호텔서교 중식당에서 일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 본격적으로 음식을 대접한 건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인 1995년쯤입니다. 저는 비서관에게 그날 김 전 대통령의 몸상태를 물어본 다음 메뉴를 정했습니다. 아침식사는 했는지, 속은 괜찮은지 등 정황을 물었죠. 속을 달래시라고 가끔 제비집수프를 해드렸습니다.
즐겨 드시던 요리는 해삼·전복요리입니다. 이희호 여사는 탕수육을 좋아하셨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찾으셨습니다. 소스 등 요리 스타일은 그때그때 김 전 대통령의 입맛을 고려해 달리했습니다. 되도록 매운 소스는 피했습니다. 담백하고 향긋한 소스 위주였습니다. 가령 해삼요리는 굴소스로 만들었습니다. 수프도 담백하게 만들었죠. 요리 뒤 식사로는 쇠고기 유니자장을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같은 메뉴라도 이걸 식사로 먹느냐 독한 중국 술의 안주로 먹느냐에 따라 맛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전 대통령은 술을 안 마셨기 때문에 소화 잘되는 메뉴와 스타일을 고른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식성이 좋아 뭐든 잘 드셨습니다. 요리가 7~8가지 나와도 자기 몫의 요리를 다 드시고 마지막에 식사로 자장면까지 다 드셨습니다. 이처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부터 1998년 청와대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많게는 한 주에 세 번 이상, 적게는 한두 번 제가 일하는 중식당을 찾았습니다. 의원, 보좌관까지 한 번 올 때마다 40명 이상의 음식을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7년 당선 직후에도 취임식 전에 두 번 오셨습니다. 임기중에는 한 번 제 음식을 찾아 청와대로 보내드렸습니다. 불행히 퇴임 뒤엔 모시질 못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진지한 사람이라고 종종 보도됩니다. 제 기억에도 그랬습니다. 원래 농담을 잘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 예외가 있었어요. 국민회의 시절 의원들과 회의를 마치고 식사하러 왔습니다. 수십 명이 함께 있었죠. 평소처럼 해삼요리를 먼저 접대했습니다. 직원은 김 전 대통령의 접시부터 요리를 덜었습니다. 그 뒤 차례대로 다른 의원과 당직자들의 접시에 요리를 덜었습니다. 직원이 다른 접시에 요리를 다 덜기 전에 김 전 대통령이 자기 몫을 다 드셨던 모양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직원에게 “있으면 더 주게”라고 하자 직원이 “정확히 사람 수대로 덜어서 남은 게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이 장난스레 웃으며 자기 앞에 앉아 있던 한 측근에게 “어이 ○○야, 네 거 이리 내”라고 농담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한 과정도 특이합니다. 1985년 무렵 저는 동교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골목마다 경찰이 신분증 검사를 시작했습니다. 출퇴근할 때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라고 구시렁거렸습니다. 하루는 용기를 내 경찰에게 물었죠. “김대중씨를 모르세요? 가택 연금된 김대중씨가 동교동에 살아요”라고 외려 이상하다는 듯 저를 쳐다봤죠.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기억한 날이었습니다. 10년쯤 뒤 그분에게 요리를 대접하리라곤 그땐 생각지 못했습니다. 퇴임 뒤 몸이 안 좋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게 김 전 대통령은 단순히 정치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던 고객이자 인간이었으니까요.”
도망가지 말고 악수라도 해둘걸
포도나무집 이화숙(51)씨가 기억하는 디제이
“제가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식당을 한 게 벌써 8년 전입니다. 저는 대통령 시절이나 야당 총재 시절엔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신문에서 보는 ‘훌륭한 정치인’이었죠. 처음으로 김 전 대통령에게 음식을 보내드린 것은 퇴임 뒤 첫 신년 하례식을 한 2003년 무렵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2005년으로 기억합니다. 김대중도서관에 직접 찾아갔습니다. 정치인 등 김 전 대통령과 50여명의 명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드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떡국 등 음식 준비를 제가 도맡아 했습니다. 매생이도 들고 갔지요. 짱뚱어(농어목 망둑어과의 바닷물고기로, 뻘에 산다)탕도 종종 해드렸습니다. 건강이 심하게 나빠졌을 땐 짱뚱어 여러 마리를 푹 고아서 갖다드렸습니다. 이걸 ‘고를 낸다’고 하는데 여러 마리를 고아도 커피잔으로 한 잔 나올까 말까 했죠. 또 동교동 자택에 김치, 젓갈 등의 밑반찬도 갖다드렸습니다. 깨죽도 자주 해드렸습니다. 저희 식당은 지난해 8월 서교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동교동에 있어서 신선한 음식을 바로 갖다드릴 수 있었죠. 식당 위치를 옮긴 뒤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이 계속 나빠져 자주 입원하셨죠. 그때 짱뚱어탕과 깨죽을 자주 보내드렸습니다.
2005년 직접 음식을 하러 갔을 때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생활한복까지 갖춰 입고 기념관을 찾았죠. 김 전 대통령이 저를 보고 비서관에게 누구냐고 물으시더군요. 비서관이 “오늘 음식을 해줄 분”이라고 설명하자, 제게 오라고 손짓하더군요. 너무 떨려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꾸벅 인사만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후회스럽네요. 악수라도 해둘걸요.”
정리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홍린 장병화(55) 주방장
김 전 대통령은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식성이 좋아 뭐든 잘 드셨습니다. 요리가 7~8가지 나와도 자기 몫의 요리를 다 드시고 마지막에 식사로 자장면까지 다 드셨습니다. 이처럼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시절부터 1998년 청와대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많게는 한 주에 세 번 이상, 적게는 한두 번 제가 일하는 중식당을 찾았습니다. 의원, 보좌관까지 한 번 올 때마다 40명 이상의 음식을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7년 당선 직후에도 취임식 전에 두 번 오셨습니다. 임기중에는 한 번 제 음식을 찾아 청와대로 보내드렸습니다. 불행히 퇴임 뒤엔 모시질 못했습니다.
장병화 주방장은 호텔서교를 나와 홍린을 열었다.
포도나무집 이화숙(51)씨
건강이 악화했을 땐 짱뚱어탕을 만들었다.
포도나무집은 퇴임 뒤 김 전 대통령이 자주 음식을 사다 먹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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