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옷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스크린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가상의 인물을 위해 옷을 짓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 권유진(50)씨. 그의 작업실엔 빛바랜 갑옷, 다음 영화를 위해 동대문에서 구해온 군복, 주홍색 비단 한복, 20세기 초 모던보이가 걸쳤을 법한 코트 등 시대를 넘나드는 옷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재봉틀과 오색찬란한 실, 출처를 알 수 없는 천 조각들이 열정적인 작업의 순간을 짐작하게 한다면, 벽에는 가공할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금홍아 금홍아>, <청풍명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여친소), <거북이 달린다> 등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영화 의상은 영화 스크린에서 봐야지, 실물로 봐서는 원래 맛이 나지 않는다”는 27년 경력의 권유진씨에게선 한 분야에 헌신한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깐깐함과 자유로움이 동시에 풍겼다. 1956년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국내 첫 영화 의상 디자이너라는 직업으로 한평생을 보낸 이해윤(84)씨가 그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무릎에서부터 영화 의상을 배운 그는 요새도 카랑카랑한 어머니에게 “요즘 옷은 왜 이러냐”고 핀잔을 듣는다.
현장에서 원하면 즉석 제작도 필수
딱 그 장면, 딱 그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옷
영화 의상은 얼마나 디테일해야 할까. “스크린은 티브이보다 몇 배로 크지 않나. 뒷목에 삐죽 나오는 실의 흐름까지도 신경 써야지. 움직임의 방식, 삶의 사연까지 정교하게 봐야 한다. 태구(송강호)의 비행모자와 고글은 2차 대전 이전의 수많은 군의상 중에서 각고 끝에 골랐다. 사막에서 자고 황야를 질주하는 인물인 만큼 누비를 입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연두색도 노란색도 아닌 특유의 겨자색 옷을 입혔고, 위에 강한 붉은색 조끼를 걸치게 했지.” 권 디자이너에게 시대적 고증은 상상과 함께 구체화된다. 오랜 작업 중 “가장 신나게, 즐겁게 작업했다”는 <놈놈놈>은 시각적으로 예민한 김지운 감독과 죽이 척척 잘 맞아서, 한편으로는 만주에서 춤추고 서울에서 연애하고 상하이에서 항일투쟁하는 격변기 시대가 주는 자유로움이 의상 디자인에도 허락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몇해 전의 인터뷰에서도 남겼던 말인 “영화 의상은 관객을 세련되게 속이는 것”이라는 권 디자이너의 소신은 “고증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으로 이어진다. “7월에 <놈놈놈> 의상 전시가 열렸는데, 누구 하나가 창이(이병헌) 옷을 훔쳐갔다. 사실 실제로 옷을 보면 영화에서 느껴졌던 그 질감과 형태가 나올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멋진 옷들이긴 하지. 영화 끝나고 도원(정우성)에게 옷 참 잘 입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만든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말을 탈 때는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할 정도였다.”
어디 눈에 확 들어오는 주인공들의 옷뿐인가. 그는 <놈놈놈>, <1724년 기방난동사건>, <가루지기>, <웰컴 투 동막골> 등의 영화에서 유독 별반 중요해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의 옷에 범상찮은 생명력을 부여했다. 권 디자이너는 “일단 주인공은 과거 뭐 했던 인물인지까지 이해가 가능하지만, 조연들의 경우엔 어디서 뭘 먹고 자고 누구를 만났을까 혼자 상상한다. 그렇지 않으면 옷을 만들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놈놈놈>의 창이파, 병춘파 등 수많은 주먹들의 옷의 질감과 색이 제각각 배우들의 연기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고, <웰컴 투 동막골>에서 시골 아낙들도 천 조각으로 덧댄 듯한 한복을 현실감 있게 걸칠 수가 있었다.
권 디자이너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에서 다찌마와 리(임원희)와 여성 요원들의 그 독특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색감의 옷들도 디자인했다. “현장에서 우리는 왕따 슈트라고 불렀는데.(웃음) 누가 입어도 왕따당하는 옷이라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얄궂게 생긴 옷이었는데, 류승완 감독이 주인공에게 입히고 싶어했던 스타일이었다. 비행장 촬영할 때는 현장이 너무 추워서 핫팩을 옷 속에 숨겨야 했던 일도 있었다.” 의상 디자이너인 그에게는 현장이 곧 전쟁터다. 전체를 지휘하는 영화감독과의 조율작업, 캐릭터 분석에서 옷 제작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은 영화 촬영 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급 에너지를 요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옥에 티’를 없애는 작업이라고 그는 말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간 큰 가족>의 서커스 장면에서는 다친 여성 배우 때문에 급히 대역을 해줘야 할 남자 배우에게 입힐 서커스 복장을 단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것은 물론, <여친소>에선 남아 있는 재료로 즉석에서 전지현을 위한 벨벳망토에 구슬까지 달아서 영화에 등장시켰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란 어떤 사람일까?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만을 위한 옷. 딱 그 장면을 위한, 딱 그 캐릭터를 위해 세상에 필요한 옷이다. 멋이 중요하지만 영화 속에서 패션쇼를 해서는 안 된다. 옷이 너무 앞서가도 안 된다. 옷이 너무 튀고 살아나면 코미디가 된다. 딱 20%까지만 뒷받침해야지.” 영화 현장에서 살고 싶다는 그는 “이제 막 영화 의상이 뭔지 조금씩 알 것 같다”며 “우리 어머니도 내가 작업한 <여행자>란 영화를 위해 극 중 고아원 아이들에게 입힐 옷을 털실로 짜주셨다”고 말했다.
알록달록 만들면서 본인은 검정색만 고집
그를 영화 의상 디자이너의 세계로 움직이게 한 건 어머니의 힘이 팔할 이상이다. 영화 현장에 놀러갔다가 얼떨결에 영화 의상을 만들게 됐던 어머니도 바느질 잘하는 외할머니를 믿고 그 일을 시작했다. 권 디자이너도 <애니깽> 촬영 때 멕시코에서 6개월을 지내고 온, 여전히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 어머니의 열정에 의지했다. “어린 시절부터 집 여기저기에 쌓여 있던 게 영화 시나리오였다. 어머니는 당시 궁중에서 옷 만들던 노인 등을 통해 디자인을 배우셨다. 난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영화 의상 디자이너인 어머니가 바로 곁에 있었다.”
<거북이 달린다>, <여행자> 같은 현대물에 쓰이는 의상은 협찬을 받거나 구입한다. 전체적인 영화 이미지에 걸맞은 옷을 찾는 일에 수십개의 파일과 국내외 시장을 찾는 현장 조사가 수반된다. 건양대에서 영화 의상 디자인 과목을 가르치는 권 디자이너는 디자이너의 덕목으로 근성과 센스를 꼽았다. “영화 의상과 일반 의상은 쓰임 자체가 다르다. 저 사람 놓치면 큰일 난다~ 소리 듣는 선수가 되려면 빨리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울 광장시장이 아시아에서 원단을 사기엔 가장 괜찮은 시장이라는 것과 화면에서 주인공이 이 옷을 입고 걸어다닐 때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어떻게 날지 알게 된다. 맘 먹고 세상의 온갖 재밌는 옷들을 만들어온 그는 정작 20년 가까이 검은색 옷을 고집한다. “으휴, 내 옷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벅차지(웃음). 원단, 질감, 디자이너의 손을 알아보는 카메라가 난 아직도 설레고 또 무섭다.”
글 현시원 기자
qq@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