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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C패. 얼굴 멀쩡’

등록 2009-08-19 19:52수정 2009-08-23 10:32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강력한 잽 한방에 세상이 빙글빙글…권투는 힘이 아니라 자제력이라는 교훈을 얻다
두 선수는 마치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알리가 다시 전진했고, 포먼이 전진했으며, 그들은 서로 원을 그리며 움직였고, 페인트(견제행동)를 던졌으며, 전기가 흐르는 링에서 움직였고, 이윽고 알리가 조심스런 첫 왼손 펀치를 던졌다.(<파이트>)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한 건 8일 아침 강원도 망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탄 뒤부터였다. 중·고·대학생부는 이미 7일 예선전이 시작됐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일반인 경기에 참가하려면 늦어도 정오까지 망상 해수욕장에 가야 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아침 6시30분에 탄 망상행 버스에서 겨우 1시간 남짓 눈을 붙였다. 동해로 놀러 가는 듯 웃고 떠들던 젊은 여자 5명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연히 벤치에 앉았다 바지 엉덩이에 껌이 붙은 것처럼, 불쾌한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반부 4명? 해볼 만한데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권투는 전술과 전략이 중요한 운동이다. 나보다 키 큰 상대에 대해 전술을 준비하지 못한 게 패인의 하나였다.

긴장감의 실체를 낮 12시30분 도착한 망상 해수욕장에서 10분 만에 알 수 있었다. 해변은 피서객으로 붐볐다. 마수년 관장님의 제자로 지금은 독립해 은평수년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최강욱 관장으로부터 휴대전화로 설명을 듣고 찾아간 특설 링 앞에서 입이 벌어졌다. 해변에 큰 천막이 있었고 그 밑에 에이(A), 비(B) 두 개의 링이 설치돼 있었다. 수많은 ‘눈’ 속에서 경기해야 할 판이었다.

하루 먼저 온 은평수년복싱체육관의 대학생들 옆에 가방을 풀고 앉았다. 예선은 이미 진행중이었다. 최 관장으로부터 대진표를 받자 ‘이길 수도 있겠네?’란 생각과 ‘지면 창피하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일반인들은 나이순으로 일반인부, 주니어부, 시니어부, 베테랑부로 나눠 시합했다. 내가 속한 시니어부(34~42살)의 웰터급(63.5~67㎏) 참가자는 4명! 한 번 이기면 결승이다. ‘에이(A)-13. 고나무-포항권투체육관 권범.’ 에이 링 열세번째 경기다.


긴장감은 경기 순서가 당겨지는 바람에 더 커졌다. 오후 3시쯤으로 경기 시간을 예상하던 내 귀에 “다음 경기, 마포수년복싱체육관 고나무 선수 준비하세요!”란 안내방송이 오후 2시께 들렸다. 세컨드(선수를 돌보고 작전을 지시)를 맡기로 한 최 관장도 당황했다. 이런, 아직 몸도 안 풀었는데? “긴장만 하지 말어.” 헤드기어를 손수 씌워주던 관장님께는 차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2-2로 비긴 후반 44분 동료가 얻은 페널티킥을 차기 위해 골키퍼와 대면한 키커의 심정’이라고 털어놓지 못했다.

바로 앞 경기 3라운드가 1분 남았다. 헤드기어를 쓰고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내 눈에 주변 풍경이 과다 노출된 화이트 아웃 사진처럼 점점 하얗게 변했다. 30초. “가볍게 끊어 치고, 상대가 키 크니까 잽잽 바디, 잽잽 바디만 하세요.” 차분하고 지적인 최강욱 관장의 말이 점점 희미해졌다. 10초. “아마추어 경기는 한방이니까, 오른손 한방을 던지라”던 체육관 선배의 조언과 최강욱 관장의 지시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 경기는 끝났다.

40여 개 동아리가 참가했다.
40여 개 동아리가 참가했다.

땡! 공이 울리자 나보다 10㎝는 커 보이는 권범씨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하마드 알리는 조지 포먼과 1974년 자이르에서 시합할 때 링에서 말을 걸었다고 이 경기를 다룬 르포 <파이트>에서 노먼 메일러는 썼다. 알리처럼 권범씨에게 “이번이 첫 경기니 살살 해주세요”라고 인사라도 건넸다면 1라운드를 그처럼 정신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게다.

가드는 결코 내리지 않고 발뒤꿈치는 든다는 원칙이 몸에 각인됐다고 생각했다. 오해였다. 1라운드 15초께 권씨의 잽을 맞은 뒤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시니어부 경기는 2분 3라운드인 대학생부와 달리 1분30초 3라운드였지만, 그 1분30초는 10분 내내 100m를 전력질주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검은 안대를 한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지고, 귀마개를 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세컨드의 외침은 뭉개져 들렸다. 1라운드를 겨우 버티고 코너로 들어오자 겨우 시야에 최 관장이 보였다.

밴드를 감을 때의 자신감은 금방 사라졌다.
밴드를 감을 때의 자신감은 금방 사라졌다.
권투의 이미지는 ‘화끈함’이다. 그러나 실제의 권투는 화끈함 따위와 상관없다. 잘 때리려면 외려 ‘상대를 때려야 한다’는 본능이나 적개심과 싸워야 한다. 냉정해야 한다. 권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때리는 비합리적인 운동’이라고 욕하거나 권투 선수를 ‘근육 바보’로 오해하지만, 역설적으로 권투는 그 ‘비합리적 목적’을 위해 어떤 스포츠보다 합리적이어야 한다. 권투 선수들도 머리가 좋고 자제력이 크다. 난 자제력을 잃었다.

2라운드에는 아예 권씨의 긴 팔이 2m되는 채찍으로 느껴졌다. 이성이 무너졌고, 그것으로 경기는 끝이었다. 1㎞를 전력으로 헤엄친 자유형 수영 선수처럼 고개를 처박고 팔을 휘둘렀다. “청 코너! 막 휘두르지 마!” 레퍼리의 첫번째 주의가 끝나자마자 첫번째 다운을 당했고, 두번째 다운을 당하기 직전에 레퍼리가 경기를 중단시키고 나를 껴안았다. 그는 “조금만 더 연습하고 와”라고 (다정한 반말로) 위로했던 것 같다.

얼굴은 흠집 하나 없었지만, 세컨드를 맡은 최강욱 관장과 “고나무 파이팅”이라고 외쳐 준 은평수년복싱체육관의 대학생들에게 굉장히 창피했다. 트렁크를 벗었다. ‘스파링과 경기는 다르구나.’ 일어나 바닷가로 갔다. ‘구기는 동료와 함께 뛰지만 링에서는 혼자구나.’ 그런 사실들이 거기 있었다. 콩쿠르에 나간 바이올린 연주자가 외운 악보를 다 까먹고 애드리브만으로 1만명의 관중 앞에서 5분간 연주하고 내려온 느낌이 이럴까? 관장님은 “첫 경기치고 잘했어. 네가 운동을 안 해서 그래. 그리고 전날 와야지 당일 새벽에 내려와 경기가 되냐?”고 위로했다. 저녁밥을 씹으며 어머니께 ‘아르에스시’(RSC·레퍼리 스톱 콘테스트) 패. 얼굴 멀쩡’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34살에 왜 이제 와서 맞는 운동을 하느냐. 내가 그런 거 하라고 너를 낳지 않았다’로 시작해 연달아 4통의 문자가 왔다.

사람들은 스포츠에서 인생의 은유를 찾는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에 열광한다. 권투는 ‘대결로서의 인생’을 은유한다. 남자라면 ‘누가 더 (주먹으로) 강한가’에 열광하는 중학생 시절을 다 거친다. 그러다 강한 자가 갖는 게 아니라, 가진 자가 강하다는 현실을 깨닫고 거기서 멀어진다. 그래서 권투를 싫어하는 사람은 권투를 ‘현실의 강함과 육체적 강함’을 혼동하는 수컷의 허세나 퇴행으로 치부한다. 혹은 좋게 쳐서 ‘헝그리 스포츠’로 분류한다. 둘 다 아닌 것 같다. 아마추어 권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행동한다는 면에서 다른 스포츠와 똑같다. 호신술로서의 실용적 쓸모도 있다.

해변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경기를 지켜봤다.
해변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이 경기를 지켜봤다.

‘맞으라고 너를 낳았더냐’ 어머니의 한숨 문자

무엇보다 아마추어 권투는 재미다. 되도록 피 흘리지 않고, 많이 아프면 그냥 다운돼도 나쁜 건 아니라고 경기 뒤 생각했다. 프로는 돈을 위해 싸우지만 아마추어는 재미를 위해 링에 선다. “이기려고 하지 말고 가볍게 딱딱 끊어 치라”는 최강욱 관장의 말이 아마추어 경기의 본질을 설명한다. 마구 주먹을 휘두른 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내려온 권범씨에게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은 이유다.

망상=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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