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안오는 밤 미스터리공포 특급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출판가 강타하는 일본 장르소설의 최전선…상상력과 추리의 핵융합 대폭발
출판가 강타하는 일본 장르소설의 최전선…상상력과 추리의 핵융합 대폭발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비채’의 편집장인 윤영천씨는 “최근 3~4년 동안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국내 출간량은 가히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고 말한다. 실용서를 제외하면 각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부문을 독차지하는 것도 온다 리쿠, 히가시노 게이고 등 유명 일본 미스터리 작가들의 신간이다.
출간작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만큼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현장의 단서들을 가지고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소설이 초창기에 유입된 일본 미스터리의 트렌드였다면, 이후 독자들은 범죄를 낳은 사회의 시스템을 고발하는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에 눈을 돌렸다. 미야베 미유키, 기리노 나쓰오 등의 소설이 그 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소설(SF), 판타지 등 다른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일본 미스터리의 신경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 밤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릴 미스터리 공포 소설들도 그중 하나다.
공포는 가슴으로 느끼고 추리는 머리로 즐긴다. 오싹하게 인간의 심상을 자극하는 비이성과 광기, 초자연 현상의 틈새에 논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반면, 사건 해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탐정들에게는 참혹한 범죄 현장도 수학 문제와 다르지 않다. 폐쇄된 공간에서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같은 공기를 들이쉬었던 이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도 생존자들은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 감성 지향과 이성 지향. 공포물과 미스터리 소설의 간극이다.
감성 지향과 이성 지향, 극과 극의 만남
언뜻 정반대편에 있는 듯 보이는 이 두 장르는 사실 본질에서 맞닿아 있다. 바로 비이성과 광기의 산물인 범죄를 종착역(공포) 또는 출발점(미스터리)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미스터리 소설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졌고, 최근의 두드러진 퓨전 경향과 함께 공포소설의 상상력은 손쉽게 일본 미스터리에 포섭되었다. 마치 범죄심리학 교과서처럼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냉철하게 추적한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 ‘일본 호러소설 대상’을 받고, 행간에서 살점과 피가 묻어날 것만 같은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충격적인 단편집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반대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1위로 선정된 전례도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이렇게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침투한 공포 장르는 여러 형태로 독자들의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본격 추리물, 즉 두뇌 게임의 옷을 입은 미스터리 공포소설들이다. 본격 추리물이 지향하는 가치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 1990년대 이후 ‘신본격’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은 이러한 가치를 우선으로 두는 한편, 노골적이고도 잔인한 범죄 묘사와 초자연적인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본 미스터리 소설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시마다 소지의 <마신유희>나 <용와정 살인사건>,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과 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로 끔찍한 묘사나 초자연적인 장치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라 하는 소설들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의 정체가 아니다. 대신 작가는 그의 범죄 동기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다 보면 결국 한 인간을 범죄의 늪으로 빠뜨린 사회 시스템의 병폐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범죄자의 자리는 독자의 몫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가 남는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범죄들은 남의 일이며 일상은 평온하기만 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현실도 실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들의 가치. 다중 채무의 벼랑에 몰린 이들의 처참한 말로를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나 끔찍한 일가족 몰살로 이어진 부동산 투기의 문제를 다룬, 같은 작가의 <이유> 등은 그야말로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공포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미스터리 소설의 틀에 공포소설의 성격을 가미한 작품들이라면, 반대로 정통 공포소설의 문법에 미스터리의 구성을 받아들인 소설들은 셋째 유형에 속한다. 퓨전으로서의 미스터리 공포 장르, 그 최전선에 있는 작품들로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이나 오쓰이치의 와 같은 소설이 대표적. 특히 2007년 일본 미스터리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저 단편집은 공포와 미스터리의 기반 아래에 판타지와 과학소설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선보인 바 있다.
공포, 판타지, 추리에 괴담, 색정까지
공포소설의 상상력을 꿈꾸는 일본 미스터리의 징후는 어쩌면 태생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에도가와 란포(1894~1965)와 요코미조 세이시(1902~1981)는 일본 미스터리의 아버지들로 손꼽히지만, 이들의 작품 세계는 상당 부분 정통 공포소설에 가까운 기괴한 상상력에 기대어 있었다. 에도가와는 다수의 작품들을 통해 정통 미스터리뿐만 아니라 신체 훼손, 심령 등 공포·판타지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 바 있다. 요코미조도 마찬가지. 그가 낳은 국민탐정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본격 추리물이지만 다루는 사건들은 악령의 전설(<팔묘촌>), 저주의 동요(<악마의 공놀이 노래>) 등 괴담에 주로 모티브를 두고 있다. <계간 미스터리>의 편집장 박광규씨도 “1920년대 이후 일본에는 ‘에로그로’(에로틱, 그로테스크의 합성어)라는 색정·호러의 전통이 존재했다”고 말하며 일본 장르소설과 공포 코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 미스터리 공포소설을 읽는 것으로 일본 대중문학의 또다른 정수를 맛보게 되는 셈이다.
글 조민준 객원기자 zilch321@empal.com·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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