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치워크로드. 소나기 속의 햇살을 찍으려고 내렸다가 무지개와 마주쳤다.
온 사방 셔터본능 자극하는 홋카이도 비에이 후라노
서울이 곧 한국이 아니며 뉴욕이 미국을, 파리가 곧 프랑스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듯 도쿄가 일본인 것은 아니다.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큰 섬 중에 가장 북쪽에 있는 홋카이도에서도 지리적으로 한복판에 위치해 홋카이도의 배꼽이라 불리는 후라노와 비에이는 일본의 다른 지역과 많이 다르다.
전세계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안내서 <론리플래닛> 비에이 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드라마틱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예술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메카. 탁 트인 들판에 라벤더, 양귀비, 보리, 밀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여기가 과연 일본인가 싶을 정도로 도쿄 등 대규모 도시가 있는 일본의 다른 지역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프랑스 시골의 자연을 보는 느낌….”
비에이역에 내려 역 바로 옆에 있는 관광안내소(사계 정보관)에서 숙소를 안내받은 뒤 렌터카를 이용해 바로 비에이 지역의 명소를 찾아 나섰다. 비에이는 지역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높은 곳에서 보면 작은 조각천을 이어붙여 한 장의 큰 천을 만드는 패치워크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패치워크로드는 비에이역의 서쪽에 펼쳐져 있고 도로를 따라 걷거나 달리다 보면 길 앞과 양옆으로 탁 트인 언덕과 밭이 시원하게 펼쳐졌다는 파노라마로드는 역의 동남쪽 방향에 있다.
파도처럼 밀밭·보리밭 넘실
⊙ 파노라마로드 | 사계 정보관에서 능숙한 영어로 친절하게 여러 가지 정보를 들려주던 영어안내원에게 등 뒤에 붙어 있는 대형 밀밭 사진이 어디서 촬영된 것인지 물어보고 그곳을 첫 목적지로 삼았다. 크지 않은 비에이 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이십 분가량 중앙선의 왼쪽 차로를 조심스럽게 달리던 도중 갑자기 벌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차를 시골의 국도변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큰 디에스엘아르(DSLR)를 보자 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고수다! 완만한 경사의 구릉을 따라 연한 노랑부터 짙은 초록까지 다양한 계조의 녹색이 끝없이 펼쳐진 곳.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보리밭, 밀밭이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이 파인더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광각으로 담으려는 유혹과 타협하면서 10분 남짓 렌즈를 밀고 당기고 노출을 바꿔주면서 셔터를 눌렀다. 프랑스의 남부지방은 가본 적이 없고, 대신 미국 중서부를 자동차로 여행할 때 좌우로 보이던 풍경과 비슷했다. 한참을 달려도 집 하나 보이지 않고 옥수수밭과 광야가 이어지던 기억이 났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국도 주변에 툭 튀어나와 경치를 망치던 큼지막한 광고판이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비에이의 들판에도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노란 밀밭 위로 빨간 지붕이 불쑥 솟아 있는데 사람이 사는 농가인지 사진을 찍으라고 세운 집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로 경관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이 지역의 모든 밭은 미관을 고려해서 계획적으로 가꾼 곳으로 파노라마로드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풍경사진가 마에다 신조가 주로 비에이 풍경을 담은 사진을 전시하는 사진갤러리 다쿠신칸이 근처에 있다.
신에이노오카 전망공원, 시키사이노오카 등 높은 지대에선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특히 사계절채색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시키사이노오카는 말 그대로 계절에 따라 30가지나 되는 꽃들이 만발하기 때문에 갈 때마다 언덕의 색이 바뀐다.
폭 덮고 잠들까 패치워크 들판
⊙ 패치워크로드 | 현지의 안내서엔 비에이 서쪽인 패치워크로드에서 볼만한 곳으로 전망이 좋은 언덕인 제루부노오카, 호쿠세이노오카 등과 함께 유난히 나무 이름을 많이 안내하고 있다. 일본의 드라마나 광고에 등장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켄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나무 등이 그것인데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있는 ‘왕따나무’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물론 나무를 둘러싼 주변의 구릉지대는 훨씬 넓다. 언덕공원 중 아토무노오카와 제루부노오카는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라벤더, 샐비어, 해바라기 등 서로 색이 다른 꽃을 벨트를 줄지어 붙여 놓은 듯 나란히 심어 뒀다. 북서쪽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호쿠세이노오카 주변엔 메밀밭과 밀밭이 볼만하다. 이곳의 메밀밭은 일본의 명물인 메밀소바의 재료로 납품하기 위해 대량으로 계약재배하는 농장이다. 무엇을 강조하면서 찍으면 수없이 많은 밀밭 사진 중 유일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흐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프랑스의 남부를 ‘보도록’ 돕고 싶어서 그렸다는 것처럼 화가가 세상의 한 부분을 그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진가라면 이 밀밭을 독특하게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는 동안 계속 비가 흩뿌리고 날이 흐렸다가 갑자기 구름 사이로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축 처져서 물기를 머금고 있던 식물들이 생기를 얻어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전원풍경을 한참 즐기는데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다시 빗방울이 떨어졌다. 역광 속의 빗줄기를 찍어볼 요량으로 차에서 내렸는데 동쪽 하늘에 선명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연거푸 셔터를 눌렀는데 노란 밀밭 위의 무지개다리는 채 5분이 되지 않아 사라졌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탄성을 지르던 관광객들은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동쪽 하늘을 한동안 바라봤다.
⊙ 후라노 | 후라노는 비에이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에 있다. 후라노엔 라벤더를 볼 수 있는 농원이 수십 곳에 이르는데 안타깝게도 8월 중순이면 끝물이지만 실망할 일은 아니다. 후라노의 농원들은 라벤더 외에도 수십 가지 꽃을 기르고 있어 5월부터 10월까지 계절별로 다양한 색의 꽃을 볼 수 있는데 8월과 9월은 라벤더의 일부 종류와 함께 해당화, 금잔화, 해바라기, 코스모스, 샐비어, 클레오메 등이 절정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철 후라노는 스키와 온천 휴양지로 유명하다.
“내 나이 아주 어려서 어딘가 낯선 고장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몰릴라치면 어른들은 나이 들면 다 그런 욕망도 사라지는 법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막상 나이가 들었다 할 만하니까 이번에는 중년이 되어야 고쳐진다 했다. 그래 중년이 된즉 좀더 나이를 먹으면 틀림없이 그 열이 식는다고들 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쉰여덟이 되었으니 아마 노쇠나 해야 풀릴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효험 있는 약은 이제껏 하나도 없었다.”
(존 스타인벡의 ‘아메리카를 찾아서-찰리와 함께한 여행’ 첫 부분)
비에이=글·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아토무노오카의 해바라기 군락지
⊙ 파노라마로드 | 사계 정보관에서 능숙한 영어로 친절하게 여러 가지 정보를 들려주던 영어안내원에게 등 뒤에 붙어 있는 대형 밀밭 사진이 어디서 촬영된 것인지 물어보고 그곳을 첫 목적지로 삼았다. 크지 않은 비에이 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이십 분가량 중앙선의 왼쪽 차로를 조심스럽게 달리던 도중 갑자기 벌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차를 시골의 국도변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큰 디에스엘아르(DSLR)를 보자 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고수다! 완만한 경사의 구릉을 따라 연한 노랑부터 짙은 초록까지 다양한 계조의 녹색이 끝없이 펼쳐진 곳.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보리밭, 밀밭이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이 파인더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광각으로 담으려는 유혹과 타협하면서 10분 남짓 렌즈를 밀고 당기고 노출을 바꿔주면서 셔터를 눌렀다. 프랑스의 남부지방은 가본 적이 없고, 대신 미국 중서부를 자동차로 여행할 때 좌우로 보이던 풍경과 비슷했다. 한참을 달려도 집 하나 보이지 않고 옥수수밭과 광야가 이어지던 기억이 났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국도 주변에 툭 튀어나와 경치를 망치던 큼지막한 광고판이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정도.
파노라마로드의 밀밭.
아토무노오카. 형형색색의 꽃 벨트.
시키사이노오카.
히노데공원. 9월까지 라벤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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