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스타르크가 디자인한 카르텔 루이 고스트 체어. 장진택 제공
[매거진 esc] 장진택의 디자인 옆차기
생산과 판매, 브랜드 현실 챙겨야 하는 디자이너의 속사정
생산과 판매, 브랜드 현실 챙겨야 하는 디자이너의 속사정
이 플라스틱 의자는 인터넷 쇼핑에서 개당 52만원이다. 온통 투명 플라스틱으로, 한 번에 꾹 찍어 만들었는데 가격이 52만원이나 한다. 그래서 아무나 사지 않는다. 카르텔(Kartell)이라는 귀한 브랜드를 알고, 필리프 스타르크라는 특급 디자이너를 인정하는 소수 시민들이 사곤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거 왜 못 만들지?”
정확히 말하면 못 만드는 게 아니고 안 만드는 거다. 누가 한국산 플라스틱 의자에 52만원이나 내겠나. 5만2000원도 힘들어 보인다. 필리프 스타르크 할아버지가 디자인했고 10년 숙성된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해도 52만원은 무리다.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을 거라 우긴다면 플라스틱의 대량생산적 특징을 들려주겠다. 플라스틱은 도장과 같은 거다. 틀을 만들어 툭툭 찍어 내는 것이 플라스틱의 숙명이다. 고로 딸랑 몇 십 개 찍으려고 플라스틱 공장을 돌릴 수 없단 얘기다. 세계인이 앞다퉈 소비하는 카르텔 정도 되니까 저런 플라스틱 의자를 쑥쑥 찍어 낼 수 있는 거다. 세계적인 생활소품 브랜드인 카르텔은 조명 등의 생활소품을 만들며 플라스틱 가공 기술에 특출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비싸게 팔 명성 있고, 잘 만들 기술 있고, 많이 팔 자신 있으니까 52만원짜리 플라스틱 의자 공장을 만든 것이다.
생활창작가구, 일룸의 우인환 디자인 팀장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에 해외 유명 디자이너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공장 시설부터 보고 싶어 했어요.” 냅킨에 그린 스케치 하나 던질 것 같았던 유명 디자이너가 공장부터 간 이유는 명백하다. 디자인은 예쁘고 기발한 형태를 만들기 이전에 생산, 판매, 브랜드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룸에서 카르텔 같은 투명 의자를 디자인하지 않는 이유, 삼성전자에서 뱅앤올룹슨 같은 오디오를 디자인하지 않는 이유, 현대자동차에서 페라리 같은 명차를 디자인하지 않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분명 창의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창작만 일삼는 건 예술 세계에서나 통한다. 디자이너는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생산과 판매, 브랜드 등의 빡빡한 현실 속에서 기발하게 창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가끔 원대한 포부를 지닌 신입 디자이너가 이런 소임을 망각하고 설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투박한 스케치만 일삼은 선배들이 무능하다며 사표를 쓸 때도 있다. 이 글을 읽고 사표 제출을 심사숙고하고 선배 말을 잘 듣기 바란다.
고스트 체어는 튼튼해 보이는 의자 사이에서 유리처럼 가냘픈 외모로 눈길을 끈다. 깨질까 두려워서 살짝 앉아야 할 것 같지만 강호동이 앉아도 끄떡없는 강성이 특징이다. 비밀은 탁월한 투명도와 유연한 강성을 함께 지닌 폴리카보네이트라는 소재에 있다. 자동차 헤드램프도 대부분 이 소재로 만든다. 한편, 이 글은 명색이 디자인 칼럼에 필리프 스타르크 한번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타에 대한 화답으로 쓰게 됐다.
장진택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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